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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15> 정보부 필화사건과 해외유학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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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15> 정보부 필화사건과 해외유학 기회

입력
2009.10.13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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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 나는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인천 용유도 해수욕장에 피서를 간 일이 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두세 시간을 가야 했는데 해수욕장 주변에는 초라한 초가집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금은 인천공항이 들어서서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상전벽해가 되었다. 휴가를 마치고 일요일에 돌아 와야 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마침 폭풍우가 있어 세 척의 배가 와야 하는데 한 척밖에 오지 않았다.

모두들 다음날 출근 때문에 그 배를 타려고 하다 보니 선착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풍랑이 심한데 과적하게 되면 사고의 위험도 있었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배 회사 직원을 도와 질서유지에 나섰다.

우리 일행은 이미 승선을 하고 있었으나 나는 승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뒤 배가 와서 그 날 오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날 승선을 포기하고 질서유지에 나선 것은 누군가 질서를 잡아 주어야 하겠다는 우발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 작은 사건이 내게는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실천하는 하나의 경험적 계기였다. 나는 개인의 이익보다 전체 사회이익을 먼저 생각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렇게 하면 개인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것이며 길게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내가 행원에서 7년 만에 대리급 조사역으로 승진한 다음 달인 1968년 3월에 정보부 필화사건이 터졌다. 이 때 우리나라는 무역적자가 커지고 경제안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1967년의 경우 수출액은 3.2억 달러, 외환보유액은 3.5억 달러에 불과한데 무역적자는 그 보다 많은 6.7억 달러였다. 소비자 물가는 11%나 올랐다. 그런데 달러당 환율은 270원 선에서 사실상 고정되고 있어서 한국은행은 환율현실화(인상)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서봉균 재무부 장관을 한국은행에 초청하여 환율인상을 건의하기로 하고 그 건의안의 집필 등 실무책임을 일반경제과 조사역 이었던 내가 맡았다.

당시의 직무라인은 총재에 서진수(작고), 이사에 홍완모, 조사부장에 박성상(후에 한은 총재), 일반경제과장에 안상국(후에 부총재, 작고) 그리고 내 밑에 행원으로 성준경 등이 있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재무부장관을 초청하여 경제현안을 브리핑 하고 대폭적인 환율인상을 건의 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동아일보 조간의 1면 톱으로 대폭적인 환율인상이 임박한 것처럼 보도 되었다. 그 날 오후 이사 이하 관련자 전원이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누가 유출했는지를 조사 받았다.

구속되어 있는 5일간 내가 겪은 위협적이고 불안한 정보부의 분위기는 처음 겪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구타하기도 했다. 조사 받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런 정도의 사건으로 이럴진대 더 큰 사건은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 때 그 기사를 쓴 기자는 박창래(후에 문화일보 편집국장)였다. 그 기자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료를 만들고 보관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내게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조사관에게 시인했다. 결국 유출책임이 내게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바로 윗분들은 모두 풀려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 기사의 취재원이 다른 곳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내가 정보부에 구속되어 있는 동안 아내가 한국은행에 아는 분을 찾아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니 그 분이 아내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해주었다고 하니 그 때의 시대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무렵 또 하나의 사건은 한국은행 본관의 작은 화재였다. 하루는 본관에서 임원에게 보고를 마치고 당시 별관에 있었던 조사부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본관 옥상에서 연기가 나고 수위들이 뛰어 가는 것 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뛰어 올라가 그 분들과 합세하여 진화작업에 나섰다. 불은 누전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다행히 초기여서 곧 진화되었다.

내가 그 자리에 참여한 것은 화재현장을 먼저 보았기 때문인 것뿐인데 진화현장에 와이셔츠 입은 직원은 나 하나뿐이었다 해서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때 인사과장은 나를 불러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느냐고 오히려 꾸중하는 것이었다.

정보부 필화사건 이후 은행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뒤 1970년에 한은에서는 처음으로 해외 학술연수 제도가 생겨 해당자를 선발하게 되었다.

지금은 석ㆍ박사과정 학술연수계획이 대폭 확대되어 있지만 그 때는 석사학위를 위해 두 사람을 2년간 보내는 것이었다. 그나마 정식 유학생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해외 사무소 직원으로 발령하되 근무는 하지 않고 대학에서 석사과정의 공부를 하라는 것이며, 학비는 따로 주지 않고 사무소에서 받는 월급으로 생활도 하고 학비도 조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편법을 쓰게 된 것은 당시 한국은행의 모든 예산이 재무부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술연수 대상자는 경제학 영어 통계학 등의 필기고사와 근무성적을 합해서 선발하였다. 오래 전부터 대학원 공부를 열망했던 나는 응시 했으나 통계학에서 과락이 되고 말았다.

나는 크게 실망하고 있었는데 은행에서 나 한 사람에 대해 통계학 재시험을 치도록 기회를 주었다. 재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나는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내 일생에 가장 큰 도약의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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