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국내 모 제조업체. 13년간 세 차례나 유예됐던 복수노조 허용 법안이 시행에 들어가면서 이 회사에도 10여 개의 노조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설립신고를 마친 노조들은 다음달로 예정된 회사 측과의 단체협약을 앞두고 교섭대표를 뽑기 위한 회의를 열었지만, 저마다 교섭대표를 맡겠다고 나서는 통에 자율 선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법에 따라 근로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으뜸노조'가 교섭대표의 지위를 부여 받았으나 혼란스러운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으뜸노조 위원장이 사측과의 협상 끝에 서명날인 해 가져온 단협에는 상여금 추가지급을 요구하는 '버금노조'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 시행을 주장하는 '딸림노조'의 요구사항이 들어있지 않았던 것.
두 노조는 으뜸노조 위원장이 모든 노조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공정대표 의무'를 위반했다고 비판하며 단협 체결 거부를 선언한 후 파업에 돌입했고, "노조 설립을 인정하면서 단체교섭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소송까지 제기했다. 지루한 소송이 이어지는 동안 이 기업의 신제품은 출시되지 못했다. 복수노조의 교섭창구 단일화가 시행된 후 기업 현장에서 벌어질 매우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다.
노동계는 최근 교섭권을 박탈한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는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에 위배된다며 대정부 총력투쟁을 선언했고, 경영계는 원칙적으로 창구단일화가 강제되면 복수노조 허용에 찬성한다는 입장이지만 기업별로는 복수노조 원천 금지부터 기업별 선별 시행까지 제각각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법 시행이 석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노ㆍ사ㆍ정이 나란히 평행선을 달렸던 13년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업들 입장 천차만별
복수노조는 허용하되 군소노조의 난립과 교섭비용 증가를 막기 위해 반드시 교섭창구는 단일화해야 한다는 게 지금까지 경총 등 경제5단체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법 시행이 목전으로 다가오면서 복수노조 허용 반대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개별 기업들을 중심으로 복수노조로 인한 현장의 혼란상에 대한 우려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례적으로 파업을 겪고 있는 A사는 복수노조 허용에 찬성하지만 교섭창구 단일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수의 노조가 들어서면 강성노조의 세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는 데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을 금지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계산이다. A사 관계자는 "복수노조는 한미 FTA 논의시 미국이 비준조건으로 내걸었을 정도로 이미 국제적 대세"라며 "다만 교섭창구 단일화로 노노갈등과 사측의 관리 비용 증가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가 활성화돼 있지 않은 B기업의 관계자는 "복수노조 허용은 시기상조"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단 2명만 노조를 만들어 신고해도 인정하고 협상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기업들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첨예한 국제경쟁 시대에 복수노조가 들어서고 직능별로 노조가 구성되면 파업이 빈발할 가능성이 높다"며 "타이밍이 중요한 글로벌 경쟁에서 시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노사관계가 안정돼 있는 C사 관계자도 "복수노조가 회사 분위기를 해칠까 부담스럽다"면서 "각 기업이 처한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적용해야지 꼭 일괄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복수의 노조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선명성 경쟁에 나설 경우 강성노조가 득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경영계의 우려다. 경총 관계자는 "정치적ㆍ투쟁적 노동운동으로 특징되는 우리 노사관계의 체질상 복수노조 허용이 노사관계 선진화에 필수 불가결한 것인지 의문"이라며 "복수노조가 선명성 경쟁을 가속화시켜 사업장의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노동계 "소수노조 교섭권 박탈은 위헌"
하지만 노동계에서는 교섭권을 제한하는 창구 단일화는 노동3권을 고도로 보장한 헌법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노동계는 모든 노조에 교섭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복수노조를 허용할 것을 강력 주장하고 있다. 소수노조에 교섭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에 위배되는 데다 식물노조, 휴면노조, 어용노조 등의 창궐로 노동운동 자체가 무력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정부의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 방안이 노동조합간의 갈등과 경쟁을 부추겨 노조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계산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 대정부 투쟁을 선언한 상태. 민주노총도 한국노총과 연대하며 정부의 복수노조 등 강행 방침에 대항할 투쟁전략을 논의할 예정이다.
교섭권을 놓고 다수의 노조들이 경쟁해야 하는 복수노조 시스템 하에서는 양대노총의 爰갚낵렝?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도 반대 이유 중 하나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교섭창구 단일화는 기업별노조가 대세였던 13년 전 상황에 근거한 것"이라며 "전체 조합원의 52.9%가 산별 및 업종별 노조원인 현 상황에는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송태희기자 bigsmile@hk.co.kr
■ 복수노조 해외사례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기업(사업장) 단위에서 복수노조 설립을 금지하는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누차 복수노조 금지 조항의 개정을 권고해왔다. 다만, ILO는 일반적으로 복수의 노조에 대해 각 노조의 대표성에 따라 우선권을 부여하도록 하고 있다. 근로자들의 투표를 통해 사용자와의 교섭창구를 단일화하거나 하나의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조의 교섭권, 단체행동권은 국가별로 차이를 보인다. 미국은 전국노동관계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가 주관하는 선거에 의해 근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노조에게 배타적 교섭권을 부여하고 있다. 캐나다도 이와 유사하게 연방과 상당수의 주는 선택적 선거제로, 일부 주는 의무적 선거로 과반 지지를 얻는 노조에 교섭권을 인정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교섭창구 단일화를 강제하지 않고 모든 복수노조에 대하여 단체교섭권을 부여하고 있어 대조적이다.
독일은 기업별 노조가 없는 산업별 노조체계로, 경영협의회(종업원평의회)를 통해 해당 사업장의 근로조건을 결정한다. 단체교섭권은 모든 노조에게 부여하지만 하나의 사업장에는 하나의 단체협약만 적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탈리아는 산업별, 기업별 교섭의 이중구조로 구성돼 있는데 기업단위에서는 통일된 근로자대표기구(RSU)가 하나의 목소리로 교섭에 참여하기 때문에 기업내 복수노조간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복수의 노조가 각자 교섭을 하면서도 단체협약은 단일창구를 통해 진행한다. 하지만 파업 등 단체행동의 경우, 노조의 주도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 각자의 선택에 따라 참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
영국은 근로자 과반이 참여한 조직된 노조는 자동으로 승인이 이뤄지지만 그 외에는 사용자의 승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승인이 거부된 노조의 경우 중앙중재위원회(CAC)의 심사를 거쳐 교섭권이 있는 노조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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