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1745~1806) 하면 풍속화가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그는 신선이나 고승 등을 소재로 한 도석화(道釋畵)에서도 조선 미술의 일인자로 꼽힌다. 이전까지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던 도석화가 단원에 이르러 완전히 우리의 색을 찾았기 때문이다.
도석화는 중국 북송 휘종 때의 '선화화보(宣和畵譜)'(1120)에 처음 등장한 용어다. 도가(道家)와 석가(釋家)의 그림이라는 의미로, 도교와 불교의 그림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점차 종교화가 아닌 감상화를 가리키는 말로 변화했다. 도석화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의 오복(五福)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어, 사회적 안정기에 주로 그려졌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전해져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조선시대 도석화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도석화특별전'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18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린다. 봄, 가을에 보름씩 일년에 두 차례만 철문을 열고 관람객을 맞는 간송미술관의 올 가을 전시다.
전시에 나올 40여명의 작품 100여점 가운데 20여점이 단원의 것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정조의 최측근 화원이었던 단원이 도석화를 많이 그린 것은 정조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당시의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 분위기도 도석화가 성행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단원은 20~30대에는 신선 그림을 많이 그렸고, 불교에 심취한 40대 이후에는 고승의 그림만 그렸다.
단원의 도석화는 풍속적 도석화다. 신선과 보살, 선승 등을 그렸지만, 얼굴 생김새는 친근한 이웃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마를 과장되게 길게 그리는 등 기형적인 용모로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중국 도석화와는 완전히 구별된다. 조선 성리학의 영향으로 탄은 이정(1554~1626) 때부터 조금씩 조선의 색을 띠기 시작하던 도석화는 겸재 정선(1676~1759)에 이르러 우리 풍속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단원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그가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치는 동방삭을 대담한 감필법(減筆法)으로 그린 '낭원투도(閬苑偸桃)'속 동방삭의 모습은 기괴한 노인이 아닌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고, 갈대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달마대사를 그린 '절로도해(折蘆渡海)' 속 인물은 조선 승려의 모습이다. 우리 것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그대로 나타난다. 내금강의 마애불상을 그린 '묘길상(妙吉祥)' 역시 부드럽고 친근한 표현이 돋보인다.
혜원 신윤복(1758~?)은 비구니가 기생을 맞는 그림 등 단원보다 한층 풍속화적인 도석화를 그렸고, 김득신(1754~1822)은 승려들이 바둑을 두는 모습 등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도석화는 추사 김정희(1786~1856)에 의해 청조 문인화풍이 정착되면서 서서히 중국풍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고, 오원 장승업(1843~1897)에 이르러서는 중국풍의 모방 풍조가 더욱 심해져 기괴한 신선도가 유행한다. 최완수 실장은 "이후 도석화에는 일본과 서양화의 영향까지 더해져 그 전통이 지금껏 내려오고 있다"면서 "오늘날 도석화가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고 말했다.
단원의 신선도는 호암미술관 등에도 소장돼 있지만, 선승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간송미술관 전시가 아니면 거의 없다. 전시작 중 중국의 영향이 다시 나타나는 후반기의 도석화들은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02)762-0442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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