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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찾아 떠난 CEO들 "사람 없는 길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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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찾아 떠난 CEO들 "사람 없는 길은 없더라"

입력
2009.10.13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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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이 200여년 전 청나라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천하를 지배한 중국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요? 인문학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작업입니다."

지난 10일 오후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 나이 지긋한 학생들 수십 명이 고궁박물관 앞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월회 서울대 중문과 교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여러분은 지금 연암이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자금성 내부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연암이 되어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을 찾아보세요."교수의 말이 떨어지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의 직원을 이끄는 기업의 CEO들이다.

이번 학기 서울대 인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과정(AFP)에 참여한 40여명의 CEO들은 그동안 강의에서 배운 '열하일기' 속 연암의 눈으로 중국을 새롭게 느껴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8일부터 3박4일간의 중국 탐방에 나섰다.

AFP는 기업 CEO들이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을 체득해 현실 속 위기를 극복하는 창조적 해법을 찾는데 도움을 주자는 취지로 2007년 처음 개설됐다. 이른바 '인문경영'의 욕구를 학문적으로 풀어주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5기째인 이 과정은 역사ㆍ문화기행 비용을 포함해 수강료가 1,200만원대이지만 입학 경쟁률이 3대1을 넘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5기생인 하현회 LG디스플레이 부사장은 "수많은 직원들의 성공과 실패가 달린 자리에 있다 보니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경영지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며 "역사, 철학 속 리더의 모습에서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다들 바쁜 시간을 쪼개 어렵게 나선 만큼 탐방 일정은 빡빡하게 진행됐다. 8일 오전 베이징 서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한 이들은 버스로 3시간을 달려 허베이성(河北省) 청더시(承德市)로 이동했다.

옛 지명이 '열하'인 이곳에서 이틀간 청 황제가 무더위를 피해 여름을 보냈다는 피서산장과 티벳 불교 사원 등을 둘러본 뒤 만리장성의 일부인 사마대 장성을 거쳐 베이징으로 이동해 자금성과 공자의 묘, 이탈리아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의 묘를 방문했다.

빠듯한 일정이지만 동행한 서울대 교수들이 현장에서 진행하는 합동 즉석강연은 탐방의 백미였다. 사마대를 둘러보던 중 김월회 교수가 "만리장성을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전쟁이 일상화된 시대에 수만명의 장정들의 관심을 돌려 내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배철현 종교학과 교수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수만명의 장정이 동원돼 수십년간 만들어진 점을 보면 같은 맥락의 해석이 가능하겠다"고 덧붙였다. '열하' 탐방에선 장진성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의 설명으로 "열하에 티벳 불교 사원을 짓고 건물을 배치한 것은 이민족 종교를 배려해 통합을 이루려는 정치의 뜻이 담겨 있다"는 내용의 '심화' 학습이 이어졌다.

곳곳에서 즉석 토론도 벌어졌다. 길거리든, 버스안이든, 두 세 명이 모이면 바로 토론장이 됐다. 버스 안에서 장창덕 삼성전자 고문이 "현장에서 보니 지금 중국은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변하며 세계를 호령하던 옛 모습을 되찾으려고 하는데 아직 우리는 대비가 미흡한 것 같다"고 말하자, 앞자리의 배철현 교수가 "중국은 지금 전세계 지식인을 중국으로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며 맞받았다.

CEO들은 AFP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됐다"는 점을 첫 손에 꼽는다. 그동안 160여명이 이 과정을 거쳐갔는데, 수료생 절반 이상이 6,7개의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인문학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각 분야 교수들을 초청해 공자, 맹자, 니체 등 동서양 철학자들을 섭렵하고 문학작품을 함께 읽기도 한다. 나름대로 '인문경영'을 시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철우 롯데백화점 사장은 국내 기업 최초로 사내 AFP 과정을 만들어 팀장급 이상 임직원들에 인문학을 가르치는 등 인문학 전파에 열심이다.

중국 탐방 길에 함께 한 CEO들은 "이번 탐방을 변화의 계기로 삼겠다"고 입을 모았다.

최종태 포스코 사장은 "경영지식보다 인간을 이해해 화합을 만들어갈 수 있는 인문학의 힘을 새삼 절감한다"면서 "채용 담당자들이 각 대학 1~2학년 인문학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미리 장학금을 지원하고 졸업 후 채용하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창주 TG삼보서비스 사장은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자는 얘기는 사장이 굳이 안 해도 직원들이 다 안다"며 "내년에는 직원들이 공감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회사 이념을 제시하기 위해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사원의 액자가 이민족을 배려해 한자뿐만 아니라 티벳어 등 여러 언어로 쓰여진 것을 관심 있게 살피던 조용경 대우엔지니어링 부회장은 "청나라 황제들을 통해 계층과 출신, 민족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존중하며 나라를 이끌어가는 힘을 배웠다"며 "이번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대한 세계의 기대도 결국 인간을 배려한 화합의 리더십일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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