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도의 민주화투쟁은 너무나 치열해서 내가 관계한 것만 기록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광화문 일대의 다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학생들을 만났고, 또 '자유의 종'을 만드느라 잠시의 여유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의 삶이 언제나 그렇듯이 71년도에는 그야말로 '올코트 프레싱(all court pressingㆍ 전면압박)'이었다.
그래서 민주화투쟁의 흐름과 나의 삶의 족적을 가늠할 수 있을 만한 몇가지 사건을 기술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학생운동의 조직화가 시급했다. 일본의 경우 2차대전이 끝나고서 미군정이 실시된 직후부터 '전국학생자치회총연합' 곧 '젠가쿠렌'이 결성되어 일본의 대미예속화 반대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는데, 우리는 학생들의 힘으로 4ㆍ19혁명을 일으켰으면서도 전국적인 학생운동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나는 1970년부터 전국적인 학생운동조직을 염두에 두고 많은 대학의 학생들을 만났으나 상호교류를 활성화하고 동지애를 강화하는 차원에 머물렀을 뿐 조직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서울법대의 이신범, 서울상대의 심재권, 고려대의 오흥진, 연세대의 이상문, 성균관대의 김대곤, 한국외국어대의 선경식, 경북대의 임구호, 부산대의 김재규, 등이 주축이 되어 전국적인 학생운동조직을 결성하기로 했다.
당시 박정희정권의 영구집권을 저지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미의 '민주수호'가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조직의 명칭을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전학련)으로 했다. 물론 이병린변호사, 천관우선생, 김재준목사 등 재야 지식인들이 결성한 '민주수호 국민협의회'와 보조를 맞춘 것이기도 했다.
4월 14일 서울상대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위원장에 심재권, 대변인에 이신범을 선임했다. 중앙위원회를 두는 정도일 뿐 하부조직을 둘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조직은 되지 못했다.
사무실도 없고 사무국도 없이 이동하는 조직이어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을 체계적으로 지휘할 수는 없었으나 4ㆍ27 대통령선거 때 선거참관인단을 조직해서 전국 각지로 내려 보낸 것은 '전학련'의 큰 성과였다.
4ㆍ27 대통령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지만, 학생들이 4ㆍ27 대통령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할 만한 근거를 확보하기는 힘들었다. '전학련'이 조직한 학생 선거참관인단의 파견으로 4ㆍ27대통령선거가 원천적인 부정선거로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4ㆍ27 대통령선거 며칠 전에 전국 대학에서 선거참관인을 모집했는데, 50명 내지 100명씩 참관인을 신청하는 대학이 많았다. 약 1만여명의 학생 참관인단을 조직해서 전국에 내려 보냈는데, 나는 서울 성산동의 산동네에서 대리투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차원에서 나갔으나 아무런 단서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4ㆍ27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약 94만표 차로 낙선했는데, 이것은 부정선거의 결과로 보기에 충분했다. 자유당정권 때처럼 올빼미표, 피아노표, 샌드위치표 등은 없었다 하더라도 관권과 금권이 총동원 된 '원천적인 부정선거'를 하고도 그 정도 표차밖에 나지 않은 것은 김대중후보가 승리한 것이라고 주장할 만했기 때문이다.
4ㆍ27 대통령선거가 끝나고서 '전학련'은 4ㆍ27 대통령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다시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대학에서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집회·시위·농성을 벌였다. 서울법대에서도 4월 30일 학생총회를 열고 4ㆍ27 대통령선거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런데 학생들이 이처럼 4ㆍ27 대통령선거의 무효를 주장하며 치열하게 투쟁한 데 비해 정작 선거의 당사지인 신민당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당시 유진산 씨가 신민당 당수였는데 박정권과 야합하고 있다는 말이 많이 돌았다.
유진산 씨는 자신의 지역구인 영등포갑구를 포기하고 전국구로 출마했는데,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인 장덕진 씨의 국회진출을 돕기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 '사꾸라' 시비를 낳았다. 한국야당사에서 '사꾸라'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었는데, 유진산 씨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심재권과 나는 신민당의 타협적 자세를 규탄하는 농성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법대와 상대, 문리대에서 30명 정도를 선발해서 신민당사를 점거해 농성을 벌이기로 했다.
법대에서는 이상덕, 정찬혹, 박원표, 정계성, 최혁배, 김경남, 양재호, 우양구 등이 이 농성에 참여했는데, 이 가운데 반 정도는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되고, 반 정도는 도주해서 구속을 면했다. 이 사건은 정치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10여명 가까운 학생이 구속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지목되어 이른 새벽 중앙정보부 직원에 의해 연행되었다. 나는 학생운동조직에서 일체 직책을 맡은 일이 없고 또 학생들을 은밀히 만났기 때문에 연행되는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는데, 당시 나의 형님이 중앙정보부 부산분실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형님을 봐서 지난번 전태일이 죽었을 때 구속시키지 않고 그냥 내보냈는데, 이번에는 구속이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나에게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김대중 씨와의 관계와 김대중 씨한테서 얼마의 돈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기는 했으나 김대중 씨를 만난 일도, 또 그로부터 돈을 받은 일도 없어 일체 부인했다.
그런데 나이가 60살은 되어 보이는 수사관이어서인지 몽둥이질을 하거나 고문을 하지는 않고 대나무로 된 30센티미터 자로 손바닥을 때리는데, 첫날은 무척 아프기는 해도 참을 만했으나 둘째날부터는 손바닥이 부어올라 약간 스치기만 해도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손바닥을 때려 고문보다 더 참기 어려웠다. 결국 부산에 있는 형님을 불러 올려 나를 인계하고는 구속은 하지 않았다.
형님은 나 때문에 사표를 낸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왜 반정부투쟁을 하는지 묻거나, 앞으로는 반정부투쟁을 하지 말라는 말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 다친 데는 없나"라고 물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반정부투쟁에 동조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속생각이야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고, 따라서 반정부투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나에 대한 상당한 믿음을 갖고 있는 같아 다행이었다. 형님과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바늘방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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