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올 2월 신한은행 본점 부서장 회의에서는 새로운 예금 상품 출시를 앞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상품개발부가 올린 상품명 '민트(Mint)'가 문제였다. 각 부서 본부장들과 부행장을 중심으로 격한 반론이 쏟아졌다."국내 수위를 다투는 명실상부한 중후장대한 은행의 대표 상품에 무슨 사탕 이름도 아니고 민트가 도대체 말이나 되나","기존 신한은행의 대표상품인'TOPs'라는 이름을 넣어 브랜드를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윤태웅 상품개발부 부장은 물러나지 않았다.
"금융위기로 사회전체가 칙칙한 분위기인 요즘 허브 향처럼 오감을 자극하는 민트라는 이름을 통해 은행 분위기를 일신하고, 고객의 절반인 여성고객들을 눈길을 끌기 위해서라도 민트로 하는 것이 낫다. 브랜드는 결국 쓰다보면 굳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윤 부장의 고집과 설득에 결국 민트는 4개월만에 시장에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새로운 것도 없는 예금 상품이지만 상큼한 이름 하나로 고객들의 눈길을 확 사로잡은 결과였다. 예금상품으로 세상에 태어난 민트는 적금과 기업 예ㆍ적금으로까지 이어지며 영업일수 70일만에 10조원을 유치한 신한은행의 초대박 상품이 된 것이다.
은행 상품개발부는 은행내에서도 독특한 부서로 정평이 나있다. 신분상으로는 보통 은행원이지만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반 뱅커(banker)와 DNA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집합체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던 상품을 만들기 위해 은행원들도 범접하기 힘든 온갖 세상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고객의 니즈(needsㆍ요구사항)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억지로라도 트랜드를 쫓아야 하는 숙명을 짊어진 이들이다. 기업으로 치면 R&D(연구 개발)부서와 마찬가지. 은행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브레인 타워나 다름 없다. 신한은행 상품개발부 윤태웅 부장, 김형우 부부장, 그리고 구현수 과장을 통해 또 다른 세계의 은행원의 삶을 들어봤다.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 꿈 깨!
상품개발부는 신한은행에서 20~30대 젊은 뱅커라면 누구나 한번쯤 지원해보고 싶은 인기 부서다. 일반 은행원처럼 정해진 시간과 일과가 없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성공이 보장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부분의 직원들은"이런 상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마치 자신이 '금융계의 에디슨'이 될 것 같은 상상을 하며 첫발을 디딘다.
하지만 그 같은 상상이 산산조각이 나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는다. 자신만의 독창적이라고 생각한 아이디어는 이미 상품예상리스트에 오른 지 수년이 지난 것들이 부지기수고, 국내 최초라고 내놓은 야심 찬 상품기획이 이미'시장 실패작'으로 확인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한은행 상품개발부가 한 해 내놓은 아이디어는 백여개에 이르고 상품 단계까지 가는 것이 40여개에 달하지만 실제 시장에 나오는 것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상품개발부에서 잔뼈가 굵은 윤 부장과 김 부부장은 항상 직원들에게 이 말을 잊지 않는다."우리는 연금술사가 아니다. 더욱이 금융상품은 발명품이 아니다."
첩보전에 가까운 정보전
금융상품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역시 '기밀 유지'다. 상품개발은 모든 은행들이 수익 창출을 위해 은행의 사활을 걸고 매달리는 만큼 개발단계부터 출시까지 모든 사항이 '대외비'에 속한다. 그래서 상품개발부 직원들은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정보전을 펼친다.
불과 2~3년전 만 하더라도 내부 정보망에 예금과 적금 등 상품종류를 올리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이제는 이것 마저도 상품명 'F' 식으로 암호명을 쓸 정도다. 구현수 과장은 "최근 은행간 정보전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상품 종류 조차도 내부망에 올리지 못할 정도다"며 "신상품과 거의 관련이 없는 알파벳이나 상품개발자만 알고 있는 암호명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했다"고 말했다.
기밀 유지와 함께 상대를 속이는 기만전도 필수 요소. 대표적인 것이 신한은행이 독점하고 있는 금 적립상품인 '골드리슈'다. 2006년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금적립식 상품 개발을 독려하기 위해 은행들 담당자를 불러놓았을 당시 대부분의 은행담당자들은 당시 금 거래 자체가 힘들고, 금 시장 자체가 크지 않아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신한은행의 윤 부장은 '만약 금 시장을 누군가 독점을 하게 되면'이라는 생각을 했고, 충분한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 혼자서 몰래 준비에 들어갔다.
물론 평소에는 은행 담당자 모임에서는 다른 은행과 마찬가지로 전혀 관심이 없는 제스처를 계속하는 기만전을 폈다. 결국 얼마 후 신한은행은 국내최초로 금적립식 상품인 골드리슈를 전격 출시했고, 이후 금값 상승으로 베스트셀러 상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윤 부장은 "만약 당시 다른 은행도 금적립식 상품을 함께 출시를 했다 지금 같은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라며 "평상시 상대를 속이며 경계심을 떨어뜨리고 내부적으로 준비를 철저히 한 전략이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히트 상품, 공생(共生)에서 나온다.
상품개발부 직원들은 히트상품의 비결에 대해 아이디어보다 중요한 것은 상품개발과 관련된 수많은 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상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관련부서의 협조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통상 하나의 상품과 관련된 부서는 적게는 6~7개에서 많게는 20개가 넘는다. 이 부서들의 원활한 합의가 되지 않으면 상품이 출시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시장에 나오더라도 성공확률이 희박하다. 그래서 상품개발부 직원들의 경우 일과의 절반 이상을 관련 부서와의 협의에 쏟아 붇고 있다.
내부 협의뿐 아니라 다른 은행과의 연합전선 구축도 중요한 요소다. 아무리 좋은 상품을 출시했다고 하더라도 시장 자체가 작으면 수익률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실제 신한은행은 지난 2003년 국내최초로 주가연동예금(ELD)를 출시했지만 당시 시장에서의 반응은 차가웠다. 크지 않은 은행이 내놓은 위험상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신한은행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시 최대 점포망을 가진 국민은행에 ELD상품에 관한 정보를 전격 공개하고, 상품 출시를 제안했다. 리딩뱅크를 끌어들여 시장을 키우고, 더 많은 상품을 팔겠다는 전략. 결국 이후 신한은행 ELD의 판매를 수직상승하며 성장을 이끌었다.
윤 부장은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는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보를 독점하기 보다 오히려 시장과 얼마나 공유하느냐에 따라 히트작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던지 공생없이는 히트 상품도 없다는 것이 9년차 베테랑 상품개발 담당책임자의 지론이었다.
▦신한은행 상품개발부가 말하는 히트상품 제조법
1. 10초안에 고객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라
2. 고객에 판매 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완전성을 갖춰라
3. 스토리텔링(상품의 이야기거리)이 있어야 한다
4. 이미 시장에 나온 유사상품을 응용하라
5. 꺼진 불(실패한 상품)도 다시 보라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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