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5시 30분 부산 해운대의 태양이 빛을 잃어갈 무렵, 두 사내가 검은 선글라스를 쓴 채 해변의 특설 무대에 올랐다. '유주얼 서스펙트'와 '엑스맨' 시리즈를 연출한 할리우드 감독 브라이언 싱어와,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을 선보인 충무로의 대표 감독 김지운이었다. 둘은 200여명의 관객들 앞에서 1시간 가량 영화에 대한 다정한 대화를 나눴다.
둘은 서로의 팬을 자처했다. 싱어는 "김 감독의 영화는 작품마다 차별성이 있어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꼽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고, 김 감독은 "싱어는 매번 다른 장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미다스의 손"이라고 추켜 세웠다. 둘은 전날 밤 호텔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우정을 나눴다고도 했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서도 공통점을 보였다. 김 감독이 "'정무문'과 '용쟁호투', '엑소시스트' 등이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자 싱어는 "'엑소시스트'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주 좋은 영화"라며 화답했다.
공포와 스릴러, SF 등 장르 영화를 거점 삼아 자신만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점도 두 사람의 공통 분모. 싱어는 "SF나 판타지는 일종의 위장을 통해 인간에 대한 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장르의 선택은 주제의 선택과 마찬가지"라며 "SF영화를 내가 택하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영화 현장에서의 책임감에 대해서도 공감을 나타냈다. 김 감독은 "현장에 서면 평소보다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며 "아마 관객과의 약속, 배우와의 약속, 투자자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책임감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싱어는 "제임스 카메론이나 마이클 베이처럼 촬영장에서 독재자는 아니지만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책임감이 있다. 그래서 잠자리에서도 일을 끌어 안고 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진출작을 준비하는 김 감독이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제작의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없다"고 애로를 토로하자 싱어는 "1억~2억 달러의 영화들이 만들어지니 개입하는 사람이 많고 의사 결정 단계가 복잡하다. 나도 투자자 설득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조언했다.
김 감독이 "결론을 알 수 없는 '유주얼 서스펙트'와 결론이 이미 알려진 '발키리' 등 상반된 성격의 영화에서 서스펜스를 어떻게 구축했냐"고 묻자 싱어는 "'유주얼 서스펙트'는 일부러 결말과 다른 점을 강조해 관객을 속인 반면 '발키리'는 캐릭터와 드라마에 집중하면서 결과가 아닌 전개로 놀라게 했다"고 응답했다. 두 사람은 이날 밤 술자리를 다시 갖자며 정감 어린, 유쾌한 대화를 마쳤다.
부산=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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