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홀로 상경해 2년이 지났을 때, 선친께서 위로(?)차 서울에 오셨다. 고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전 눈이 많이 온 날이었는데, 선친께선 공부하기 바쁜 나를 어느 곳으로 데려갔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동상이라고 했다. 연일(延日) 정(鄭)씨 문충공(文忠公)파의 조상이라며 불사이군(不事二君), 애민(愛民), 실용(實用) 등에 대해 한참 설명하셨다. 시조 단심가(丹心歌)도 몇 번이나 들려 주셨다. 그래선지 나의 기억 속엔 700여년 전의 포은 선생이 언젠가 만나 뵌 인물처럼 남아 있다. 동상이 세워진(1970.10.16) 그 해, 정확히 39년 전 일이다.
▦우리 아이에게도 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그 동상을 보여 주었다. 단심가도 들려 주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딱 한 번이었는데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으며, 마치 어릴 적 만나기라도 했다는 듯 "포은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남해 도처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얼굴은 물론 포즈도 다양해 칼을 오른손에 들기도 하고 왼손에 쥐기도 했으며 두 손으로 모아 든 모습도 있다. 아예 칼 없이 지도를 들고 상념에 잠긴 동상도 있다. 무엇이든 이를 바라보고 자란 아이들의 마음에 장군의 모습이 깊게 새겨져 있을 터이다.
▦동상은 그런 것이다. 특정 인물을 형상화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고 그 뜻을 기려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조형물이다.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실제에 가깝게 모습을 재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국 국민이 가장 사랑한다는 셜록 홈즈의 동상은 소설 속의 인물을 소설에 나온 주소지에 만들어 놓았지만 그 누구도 조작됐다거나 멋대로라고 외면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실제 인물과 똑 같이(오히려 더 멋있게) 재현했더라도 시민들에 의해 핍박 받아 넘어뜨려지고 부숴지는 경우도 많다.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 동상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새로 세워졌다. 모습을 미리 본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나 보다. 1만원권에 새겨진 얼굴과 다르다느니, 여의도나 덕수궁의 동상보다 뚱뚱하다느니, 심지어 나이를 따지고 소매 속으로 보이는 속옷의 가짓수까지 설왕설래하고 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다.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열성과 노고를 치하한다. 눈으로 동상만 보려 들지 말고, 마음으로 세종대왕을 느끼고 새겨야 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제왕 가운데 왜 세종대왕의 동상만 책을 들고 있는지, 그런 것부터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자.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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