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의 향연> 을 읽고 있는데 어디선가 "형민남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 큰 아들의 이름에 '–남'을 붙인 것인데 서울말로 하면 '형민 아범'쯤 된다. 한창훈의>
내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이 호칭을 잃어버렸다. 가끔 외삼촌과 이모 그리고 여수에 사는 사촌누나 정도가 나를 그렇게 부를 뿐, 형이나 두 누나도 어색하다며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 또는 그 연배의 고향 어른들에게서나 듣던 그런 호칭이 <한창훈의 향연> 에 나온다. 그 자신은 딸 이름을 따 '단하남'으로 불린다고 했다. 소설이나 TV드라마에 사투리가 적지않게 나오지만 나는 아이 아빠를 '–남', 아이 엄마를 '–늠'으로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한창훈의>
그래서 그것은 그저 내 부모님 그리고 고향 사람들이나 쓰던 한정된 명칭이라 생각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자연스럽게 잊고 살았다. 그것을 또래의 소설가 한창훈이 그의 책에 글로 쓴 것이어서 적잖은 전율을 느꼈다.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부모님의 육성이 문자로 나타난 것이다.
책에는 덕일호라는 배가 나온다. 쾌속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덕일호에 몸을 싣고 여수와 거문도를 오갔다. 1985년 여름, 아버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요양차 고향 거문도로 들어갔을 때 나 역시 이 배를 타고 아버지를 뵈러 갔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지만 여수에서 초도, 손죽도를 거쳐 거문도로 들어가면서 익숙하지 않은 뱃멀미에 꽤나 시달렸다.
한창훈은 이 책에서 거문도 출신들이 부산 영도에 모여 산다고 적었는데 내가 바로 그런 경우다. 어린 나는 몰랐겠지만, 어른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엄연한 정서적 차이 속에서 적지않은 갈등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와 나는 살아온 게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나보다 고생을 더했고 더 호탕하게 산 것 같다. 살아온 경로의 차이가 크지만 이 책은 서울 생활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뛰고 있는 내게 부모님과 고향 어른들을 생각나게 했다.
거문도에서 여수로, 다시 부산으로 흘러들어 배를 타던 그 사람들의 외로운 삶과 그 가족들의 피곤한 생활이 떠오른다. 그래서 <한창훈의 향연> 을 나는 몇 번 더 읽었다. 한창훈의>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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