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사 문화가 우수한 기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일이다. 노사협력 실적이 우수한 기업들을 대상으로 본선 심사를 하는 자리였다. 나름대로 우수한 실적을 입증하는 증빙자료로 제출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 속의 근로자 대표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을 움켜쥔 채 서있었다.
노사 평화의 길 고민할 때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런 사진을 노사협력을 입증하는 자료로 제출하다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머리띠는 붉은 색이 아니고 푸른 색이었다. 또 띠에는 흔히 보던 '쟁취'구호대신 '목표 성취'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었다.
쟁취의 뜻을 그대로 풀면 '싸워서 얻는다'는 것이다. 성취는 '이루어서 얻는다'는 의미이다. 노사관계만이 아니고 우리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쟁취란 단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것을 목격한다. 민주화 이후 지난 20여 년간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도 유독 쟁취라는 단어는 예나 지금이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는 대표적인 구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갈래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풀어주는 제도가 미비하기 때문에 그만큼 이해 당사자들이 치열하게 다투어서 해결 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가진 자와 상대적 약자 사이의 배분이 공정하지 못하기에 어떻게든 싸워서 받아내야 한다는 피해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대화와 타협으로는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없는 소통부재 현실을 반영한다. 이를 뭉뚱그리면, 우리 사회가 근대화에 성공한 경제모델을 가지고 있지만 속살은 여전히 일상적으로 싸워야 되는 전근대적 갈등형 사회에 머문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쟁취형 사회에 널리 퍼진 피해의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결과가 아닌 과정의 공정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기회를 충분히 주고 성과가 나오면 객관적인 사전 약속에 의해 분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일하는 자와 일을 부리는 자로 구분되는 신분제적 질서를 깨기 위한 역할 중심의 조직개발이 필요하다. 이것이 성취형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노사문화가 우수하다고 평가된 기업들의 공통점도 대부분 이런 데서 찾아볼 수 있었다. 직무중심의 합리적 생산조직, 객관적이고 명시적인 성과 배분제도, 경영
위기 때 희생을 솔선수범하는 경영진과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존중하고 따라준 직원들, 임직원 모두가 같은 넓이의 기숙사형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례 등등, 쟁취형 노사 문화를 기업에서 걷어내기 위한 남다른 노력들이 있었다. 결국 이들의 노사 평화는 손 쉽게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노사 양쪽의 땀과 노력으로 일구어 낸 것이다.
갈등 줄이는 제도 확립을
우리 노동 현장이 쟁취형 모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정한 사회적 규율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경쟁 질서를 공정하게 규율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있는 것처럼, 노동 분야에도 노동위원회가 있다. 문제는 노동위원회의 역할이 대부분 노사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이를 조정하고 판정하는 사후적 규율기능에 치우쳐 있는 점이다. 노사 간에 싸움이 나기 전에, 그리고 서로 싸울 필요가 없도록 노사관계의 공정한 질서를 사전에 규율하고 세밀하게 과정상의 공정성까지 규율하는 노력이 한층 필요하다.
노사가 평소 서로 믿고 협력할 수 있는 기준을 확립한다면 우리 노사문화가 성취형으로 바뀌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을 확립했다. 이제 근대화의 완성을 위해서는 집단적 분쟁과 갈등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줄이고 해소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인프라를 확립해야 한다.
이장원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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