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또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차였다. 한국일보 9월 26일자 의'바우길과 심스테파노길'이란 칼럼을 읽다 무릎을 내리쳤다. 소설가 이순원씨가 고향 강원 강릉시 일대에 제주 올레길 못지않은 트레킹 코스를 직접 조성했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대어가 걸린 낚싯줄처럼 묵직한 기대감에 가슴이 팽팽해졌다.
제주 올레길의 성공 이후 전국에서 걷기 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그 많은 신생 길들 중 유독 바우길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강릉시와 주변 지역이 뿜어내는 매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대관령을 비롯한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줄기와 경포대 주문진 정동진 등의 맑고 푸른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고장이다.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는 역사와 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땅이다. 여기에 이 고장이 낳은 이야기꾼인 이씨가 한 땀 한 땀 걸으며 길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는 게 아닌가.
냉큼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함께 바우길을 동행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 강릉시에서 이순원씨를 만났다. 바우길 개발의 또 다른 축인 이기호(51) 바우길 개척대장도 함께 한 자리였다. 해거름에 만난 자리라 트레킹은 다음 날로 미루고는 간간이 막걸리 잔을 부딪혀 가며 바우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키는 '바우'란 단어가 친근해 좋다는 덕담에 이씨는 "바우는 또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손으로 한 번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죽을 병을 낫게 한다는, 친절하고 위대한 건강의 여신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고 했다. "바우길을 걸으면 바우 여신의 축복처럼 저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코스 개발 5개월 만에 10개 코스가 그려졌다면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이 대장은 "있는 길을 그대로 살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존의 농로 임도 오솔길 둑방길 산책로 등을 씨줄 날줄 엮듯 이어 만든 길이다.
작가는 "길은 억지로 만들지 말자고 했다. 인류가 걷고 다닌 지 이미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가. 지금껏 길이 나지 않은 곳이라면 그곳엔 길이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 억지로 길을 냈다간 반드시 동티가 나기 마련이다"고 했다.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과 비교해 다른 점이 뭔지를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두 곳 다 아직 다녀오질 않았다는 것이다. 바우길에 대한 무모한 자신감은 아닌가 하며 머리를 갸웃거리자 이씨는 " <은비령> 을 쓸 때도 한계령의 필례약수터를 미리 찾지 않았고, <수색, 그 물빛 무늬> 나 <압구정동에 비상구가 없다> 를 쓸 때도 사전에 수색과 압구정동을 찾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압구정동에> 수색,> 은비령>
이유는 "가는 건 쉽지만 갔다가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상상이 차단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미리 가 본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이 길 만드는 상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길이 얼추 자리를 잡게 되면 반성하러 그 길들을 찾아갈 계획이다"고 했다.
그는 등산 지도를 펼쳐 놓고 등고선의 휨과 간격만 가지고도 산세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고 했다. 안개가 어느 방향에서 흘러 들어와 머물지, 계곡 속으론 어떤 빛이 비추고 산봉우리 너머론 어떤 별이 뜰지를 떠올리며 글을 써갔다는 그는 "<은비령> 을 나중에 독자들과의 행사 때 처음 가 보고는 글 속의 풍경과 너무 똑같아 나도 놀랐다"고 했다. 은비령>
이 대장은 강릉 시내에서 두루치기 찌개로 이름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돈 좀 모이면 일 년에 한 번은 히말라야에 트레킹을 떠나야 체증이 풀린다는 산 사나이다. 그는 바우길 때문에 올해의 히말라야 트레킹 계획을 접어야 했다. 대신 바우길을 찾느라 배낭을 메고 들길과 해안길, 마을 고샅을 헤매야 했다.
그때 만난 지인들은 "큰 산에 있을 당신이 왜 이런 곳에 있냐"며 지청구를 해 댔다. 하지만 이 대장은 "처음에 이 길이 성에 안찰 줄 알았는데 자꾸 나가다 보니 이젠 내가 이 길에 미치게 됐다. 내가 사는 곳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고, 등산로와 달리 여유가 충만해 너무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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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글·사진 이성원기자
■ 바우길 2코스 '대관령 옛길'
이순원씨, 이기호 대장과 함께 답사에 나선 바우길은 2코스인 '대관령 옛길'이다. 시작점은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1코스인 '대관령 등길'과 출발점이 같다.
산림청에서 최근에 조성한 산길을 타고 올랐다. 예전 선자령 눈꽃 트레킹을 떠날 때는 콘크리트 포장된 능선길로 올랐는데 숲 속의 오솔길인 새 등산로가 뚫린 것이다.
대관령의 나무들은 이미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숲길은 속새 군락지를 지나고, 아담한 실개천을 넘는다.
숲 터널을 잠시 빠져나온 길은 양떼목장 옆을 스쳤다. 입장료 내지 않고 양떼목장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구간이다.
길은 국사성황당으로 이어졌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는 매년 이곳에서 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강릉인들에게 유독 각별한 신당이다. 일행은 성황당 살림채의 수도꼭지를 틀어 '산삼 썩는 물'이라며 물을 나눠 마시곤 선자령 능선으로 올랐다. 능선에서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길이 이어졌다. 대관령 옛길이다.
급경사의 비탈에 놓였음에도 길은 한없이 유하다. 신작로가 놓이기 전,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이 길로 등짐 실은 나귀가 오르고 새색시 태운 가마가 내려갔다고 한다. 길 바닥엔 방금 떨어진 싱싱한 낙엽이 뒹굴고 있다. 겨울을 준비하는 다람쥐의 바지런한 움직임으로 숲은 부산스럽다.
옛 고속도로와 만나는 반정에 도착해 잠시 쉬기로 했다. 넘실거리는 산자락 너머로 강릉 시가지와 푸른 동해가 펼쳐졌다. 김홍도가 그린 '대관령도'와 닮았다.
반정에서 내려가는 길, 이씨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한 나무 앞에 섰다. 호두와 비슷한 가래나무란다. 동글동글한 호두는 중국서 넘어온 것이고 끝이 뾰족한 가래는 토종이다. 이씨의 목에는 이 가래 껍질을 매단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의 휴대폰 줄에서 덜렁거리는 것도 가래 껍질이다. 그는 "세계적인 걷기 여행지인 스페인 산티아고 길의 상징이 조개껍질이라면 바우길은 가래 껍질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터벅터벅 걸음은 어느덧 옛길의 끄트머리에 있는 주막을 만났다. 초가 지붕 위로 박 넝쿨이 올라 보름달 같은 박이 여물고 있고, 물레방아 옆엔 소박한 맨드라미 꽃밭이 만들어져 있다
대관령 휴양림 입구를 지날 때다. 이씨는 누렇게 익은 벼를 가리켰다. 이게 강원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밭벼라고 했다. 물을 가둔 논이 아닌 밭에서 키운 벼라니 신기했다. 그냥 지나쳤으면 몰랐을 것을 듣고 보니 벼 이삭들이 예사롭지 않다.
어흘리를 지난 바우길은 옛 고속도로를 건너 다른 아스팔트 길로 안내했다. 이 대장은 포장됐지만 죽은 도로라 했다. 길을 닦던 중 누군가 땅을 팔지 않아서인지 공사가 중단됐고 길은 중간에서 끊기고 말았다.
이씨는 "길은 이처럼 억지로 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다. 한적한 아스팔트 길, 중앙선을 갈지자로 넘어 다니며 걷는다. 포장길 끝에선 다시 산길을 타고 보광리로 넘어간다. 짙은 초록의 터널이다.
이어 길은 복바위를 지나 대관령유스호스텔에서 멈춰 선다. 2코스의 종착점이다. 지금까지 걸은 거리는 14.5km. 중간에 도시락으로 요기를 때우면서 걷기에 하루 코스로 알맞은 거리다. 이씨와 이 대장의 눈은 다시 이곳에서 출발하는 3코스를 향해 빛을 뿜었다.
강릉= 글·사진 이성원 기자
■ 심스테파노 길… 정동진 가는 길… 어딜 가든 솔향기 솔솔
이순원씨와 이기호 대장 등이 주축이 된 바우길추진위원회가 올 봄 코스를 만들기 시작해 지금까지 개설한 구간은 모두 10개다. 백두대간 능선을 거니는 코스, 산록에서 들판으로 뻗어 내린 길, 바다를 따라 걷는 해변길, 바다와 숲을 오가는 길 등 각 코스는 개성을 달리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강릉시 일대의 금강송이나 해송이 우거진 아름다운 솔숲을 꼭 지난다는 것. 이씨는 "같은 숲이라도 솔숲에선 몸의 반응이 다르다. 소나무가 주는 치유력에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다"고 했다.
코스마다 각기 숫자 말고 또 다른 이름이 붙는다. 1코스는 '대관령 등길', 2코스는 '대관령 옛길', 7코스는 '심스테파노 길' 등이다. 나머지 코스에도 '바다맞이 길' 같은 이름이 붙을 예정이다.
1코스 대관령 등길의 출발점은 옛 영동고속도로의 대관령 휴게소. 숲길을 타고 올라 샘터를 지난 뒤 풍력발전기들이 밀집한 언덕을 넘는다. 이씨는 "대관령은 균일한 속도의 바람이 연중 불어 풍력발전하기에 최적의 땅"이라고 소개하곤 "발전기 하나로 1,000가구의 불을 밝힐 수 있고, 대관령에 있는 53기의 풍력발전기 발전량이 소양강댐의 절반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풍력발전기를 헤집고 오르면 선자령이다.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에 선 봉우리로 해발 1,157m 높이에서 사방의 높고 낮은 산들의 물결을 감상할 수 있는 백두대간의 전망대다. 선자령에선 능선길을 타고 출발지로 내려오게 된다.
대관령 옛길인 2코스는 옛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 국사성황당을 거쳐 반정_옛길 주막_어흘리를 지난 뒤 보광리로 이어진다.
보광리에서 출발하는 3코스는 초반이 조금 힘들다. 1시간 정도 오르막길을 걸어 표고 200~300m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 힘겨움의 끝에 만나는 아름드리 금강송 군락이 피로를 말끔히 풀어 준다.
지난해 경복궁 복원용으로 쓰인 금강송을 벤 자리는 '어명정'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금강송은 조선 왕실에서 관리했던 목재로 함부로 벨 수 없었다. 나라의 허락을 받아 나무를 벨 때는 나무 앞에 제단을 차리고'어명이요'를 3번 외쳐야 했다고 한다. 보현사를 거친 길은 명주군왕릉에서 끝난다.
4코스는 명주군왕릉에서 출발해 바다로 향한다. 사천면 해사리를 지나는데 5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은 골목이 무척 아름답다. 마을을 벗어난 길은 사천진리까지 사천천의 둑방을 타고 간다.
사천진리에서 출발한 5코스는 해안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다. 경포호를 한 바퀴 돈 길은 다시 남항진의 바닷가로 흐른다. 남항진 직전 남대천 위로 난 솔바람교를 건넌다. 경포호 둘레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솔향 그윽한 허균 허난설헌 솔숲공원이다.
6코스는 남항진을 출발해 강릉시의 편안한 들판 위로 이어진다. 시골길을 지나고 저수지를 스쳐 도착하는 곳은 굴산사지. 신라 때의 거찰로 그 터에 남은 굴산사 당간지주가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국내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 가장 크다.
7코스는 경포호와 명주군왕릉을 잇는다. 중간에 지나는 경암동은 조선 말 심스테파노란 천주교인이 영동 지역에선 드물게 신앙 생활을 하다 순교한 곳이다.
8코스는 다시 굴산사 당간지주가 있는 학산마을에서 출발해 정감이마을의 솔숲 언덕을 넘은 뒤 안인진 바다로 이어진다. 안인진에서 정동진까지 9코스는 바다를 낀 능선으로 이어진다. 바다 바로 옆 산길에서 동해의 청청함을 만끽할 수 있다.
10코스는 정동진에서 심곡을 거쳐 옥계의 한국여성수련원의 솔밭까지다. 바다 바로 옆의 솔밭이지만 해송이 아닌 아름드리 금강송들이 어우러져 있다.
바우길은 아직 이정표 설치 등 준비가 덜 된 상태다. 강릉시와 협의 중에 있어 이달 안에 간이 화장실 등과 함께 설치될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바우길 이정표의 디자인으로 '진또배기'가 어떨까 제안했다.
강릉시 강운마을을 지키고 선 오리 모양의 솟대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전국의 많은 솟대 중 가장 조형적으로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했던 솟대다. 갈림길에서 갈 길을 일러주는 역할이라면 진또배기의 부리만으로 충분해 보여 이씨의 제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강릉= 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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