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지음, 문학동네 발행·328쪽·1만1,000원)
"인간이 주접스러운 느낌, 깔끔하지 못하고 더러운 느낌이라는 뜻으로 썼어. 삶이란 그런 것이지. 영광과 자존과 그런 것으로만 삶을 살 수는 없잖아. 그런 부분은 얘기도 잘 안하려 하고…"
<남한산성> 을 끝으로 역사소설을 작파하고 당대를 무대로 한 장편소설을 내놓겠다고 공언했던 김훈(61)씨. 그 결과물인 새 장편소설 <공무도하> 에 쓰인, 조금은 생경한 '던적스럽다'는 낱말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여전했다. 공무도하> 남한산성>
비루하고 치사한 삶을 견뎌가는 인간들. 무대는 현대로 옮겨왔지만 <공무도하> 에도 그런 삶의 치욕과 그것을 서럽게 감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런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런 삶은 정당하지 않은가? 작가는 또다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공무도하>
"배경을 묘사하는 데 도움은 됐는지 몰라도 내 직업적 체험과는 관련 없다"는 부인에도 불구하고 소설에는 작가의 전직인 신문기자 체험이 생생하게 녹아있다.
소설의 뼈대는 사회부 경찰 출입기자인 문정수가 취재 현장에서 만난 인물들, 치욕을 견디며 살아가는 그들의 사연을 출판사 편집자인 연인 노목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소방청장상을 받은 베테랑 소방관이지만 귀금속상가 화재 진압 현장에서 훔친 귀금속을 장물조직에 넘겨 사업 밑천을 마련한 박옥출, 치매기가 있는 노모에게 초등학생 아들을 맡겼다가 아들이 개에 물려 죽자 자취를 감춘 오금자, 노학연대 활동을 하다 붙잡히자 동료들의 은신처를 자백하고 잠적한 노목희의 대학 선배 장철수, 건설현장에서 중장비에 깔려죽은 중학생 딸의 보상금으로 농협 빚을 갚고 사라진 농부 방천석 같은 인물이다.
세상의 진창을 기어가고 있는 그들은 말하자면 <남한산성> 에서 인조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최명길의 삶의 현재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소설의 중요한 배경은 간척지 매립공사가 진행 중인, 끝없는 뻘밭이 펼쳐져 있는 어촌 마을 '해망'이다. 젊은 기자 문정수는 박옥출의 배임, 오금자의 미심쩍은 잠적과 관련된 뒷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 해망으로 내려가지만 갈 때마다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는 데는 실패한다.
해망에만 내려가면 허탕을 치는 문정수를 신문사의 데스크가 꾸짖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작가는"뻘밭에 발이 푹푹 빠지듯 현실의 벽 앞에서 허탕을 치고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모습을 젊은 기자 문정수를 통해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법률용어와 행정용어를 동원한 사건사고에 대한 묘사, 꼼꼼한 사실 취재를 바탕으로 한 현장의 재구성 등 이 소설은 '기자적 글쓰기'가 하나의 소설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내 문장이 아름다운지는 모르겠다. 그저 절박하다"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수식어와 접속사를 배제한 간결한 호흡에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실어나르는 김씨의 문장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가령 '이 세상의 색들은 빨강, 파랑, 노랑으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빨강에서 파랑으로, 파랑에서 노랑으로, 검정에서 흰색으로, 끝없이 전개되는 흐름의 진행태였고 거기에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묻어있지 않았다' 혹은 '민들레의 무리는 땅바닥을 긁는 포복의 대열을 이루며 소금기가 점차 빠져나가는 펄의 안쪽으로 진출했다. 물이 말라가는 펄은 그 밑에 쌓인, 창세기 이래의 소금기를 햇볕에 증발시켰다' 같은 미문은 매혹적이다.
<공무도하> 는 김씨가 처음으로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 20일쯤 전에 막 탈고했다는 그는 요즘 임진각으로 자전거를 몰고 가기도 하며 머리를 식히면서 새 소설을 구상중이다. 공무도하>
"아직 막막하지만 계속 당대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강력한 힘을 풍기는 스트레이트 문장으로만 된 소설을 쓸 생각"이라고 그는 귀띔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사진=김주영기자 wil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