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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시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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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시 읽는 즐거움

입력
2009.10.12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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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테니스 동아리 총무를 맡은 적이 있다. 매주 이메일로 공지사항을 보내면서 시를 한 편씩 골라서 보냈다. 처음에는 자연이나 계절을 느끼는 시인의 정서가 잘 드러난 시와 같이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시로 골랐다. 교정이 신록으로 물드는 이른 봄에는 이정록 시인의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 같은 시를, 벚꽃이 만발한 날에는 김영남 시인의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같은 시를 보냈다.

이렇게 입맛을 돋운 다음에는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처럼 표현력이 뛰어난 시, 위선환의 '새떼를 베끼다' 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시를 거쳐서 나희덕의 '그곳이 멀지 않다'처럼 삶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가 있는 시나 김진경의 '슬픔의 힘'처럼 시대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시를 보냈다. 총무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도연명의 '음주시'나 '귀거래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법대나 공대, 자연대 교수들이 더욱 좋아했다. "시가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는 평범한 감상부터 "시인의 상상력에 감탄했다"거나 "표현력이 뛰어나 놀랐다"는 구체적인 감상까지, 그들은 이미 시 중독자였고, 시인을 찬양하는 광신도였다. 고급 평론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시를 읽는 즐거움을 흠뻑 누리는 것 같았다.

고무된 나는 회원들을 테니스장 귀퉁이에 앉혀놓고 시를 제대로 읽기 위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얘기했다. 모든 문학예술 작품이 그렇듯이 시도 돌려 말하기이며 달리 말하기이고, 예를 들어 말하기이며 빗대어 말하기이고, 압축해서 말하기이므로 시에 표현된 것이 전부라고 여기지 말고 시인이 말하려는 바를 알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시는 달을 가리키는 시인의 손가락이니 달을 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참았다. 그들은 이미 가슴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 것은 시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서이고, 이것을 모르는 이유는 좋은 시를 접해본 적이 없어서이고, 접해본 적이 없는 이유는 시를 안 읽기 때문이다. 이 무지의 악순환을 깨는 데에는 시를 지속적으로 읽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계속 읽다 보면 시 읽는 즐거움과 시의 원리를 스스로 깨우치게 되리라.

하루는 테니스장에 잘 나오지 않는 교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보내주는 시를 보는 낙으로 한 주를 산다고. 과도한 칭찬은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없다. 시가 그렇듯이. 부탁이 있다는 뜻이다. 제자 결혼식 주례를 서기로 했는데 주례사에 넣을 만한 시를 골라달라고 했다.

아름다운 부탁이어서 흔쾌히 승낙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함민복 시인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 에서 시 한 편을 골라 보냈다. 친한 사람 결혼식에도 잘 안 가지만 주례 선생님이 예비부부를 위해서 시를 읽어 주는 결혼식이라면 한번 가보고 싶었다.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의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함민복의 '부부').

권정우 충북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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