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준(33)씨가 화선지를 뚫어지게 봤다. 종이결을 찾기 위해서다. 왼쪽 눈의 가시각(可視角)이 정상인의 3분의 1, 오른쪽 눈은 절반에 불과해 종이를 한눈에 볼 수 없는 조씨에게 종이결은 글씨가 비뚤어지지 않게 하는 기준이 된다.
먹물을 머금은 그의 붓은 유유자적했고, 화선지엔 독특한 글꼴의 한글이 낯선 아름다움을 뽐냈다. 조씨는 이렇게 썼다. '한글 대중과 소통을 꿈꾸다.'
조씨는 한글 손글씨 작가다. '아름답게 쓰다'라는 어원을 가진 캘리그래피(calligraphy)로도 불리는 손글씨는 문자가 지닌 조형미를 표현하는 예술작업이다. 조씨가 손글씨를 시작한 것은 2년이 조금 넘었지만, 그동안 쌓은 경력은 자못 화려하다.
지난해 5월 한 제약회사에서 주최한 손글씨 공모전에서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상을 받았고,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오감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의 타이틀도 맡아 썼다. 지금,> 오감도>
조씨는 한글 손글씨가 5년 동안 이어지던 인생의 암흑기에서 자신을 구원했다고 했다. 대학에서 영상디자인을 전공하고 지인들과 실내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조씨는 2002년 여름 갑자기 눈이 침침해졌다.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의사 처방대로 인공눈물을 넣고 안경도 새로 맞췄지만 시력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원인이 뇌하수체 종양이란 걸 발견했을 땐 이미 왼쪽 시력을 거의 잃은 후였다. 위험한 공구를 다뤄야 하는 인테리어 작업을 할 수 없어 사업은 2년 만에 접어야 했다.
그해 말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한동안 나아졌던 눈은 2004년 종양이 재발하면서 결국 회복 불능 상태가 됐다. 시야가 좁아졌고, 보이는 부분마저도 초점이 흐려졌다. 시신경이 끊겨 생긴 증상이라 교정 기구도 소용 없었다. 조씨는 2006년 12월 시각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첫 수술 이후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신참내기 사회인으로 활기차게 살아가는 친구들 모습을 보기 버거웠고, 병원에 다니며 세월을 허송하다 보니 삶의 의욕도 점점 떨어졌다.
조씨는 "어느새 취업하기 힘든 나이가 됐는데, 장사를 하려 해도 운전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방에 틀어박혀 식구들과 며칠씩 한마디도 안하는 일이 허다했다. 고생하며 길러주신 부모님보다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신기신 견뎠다.
2007년 어느 여름날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형 용준(37)씨가 그에게 "손글씨를 함께 배워보자"고 말했다. 실의에 빠진 동생이 새로운 것을 배우다 보면 다른 길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섞인 제안이었다.
형에게 이끌려 조씨는 그해 8월 서울 마포구 필묵아트센터에 개설된 손글씨 교육 과정에 등록했다. 손재주 좋은 조씨는 금세 두각을 보였다. 16주 과정을 마칠 때 동기생 10여 명 중 가장 뛰어난 학생에게 주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즐거웠다. 조씨는 "붓 끝에 집중하면 머릿속 가득했던 절망감과 패배감이 홀연히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전문가 과정으로 진급할 땐 반장을 맡을 만큼 사회성도 회복했다. 형이 낸 책 표지를 장식해주고 공모전에서 큰 상까지 받으면서 조씨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손글씨를 '내면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하는 조씨는 한글만큼 손글씨에 제격인 문자는 없다고 말한다.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뤄져 있어 다양한 방식의 창조적 조합이 가능하다. 미묘한 의미 차이를 가진 유사 단어가 많은 점도 표현을 풍성하게 한다.
예컨데 '불그스름하다'라는 글씨를 쓸 땐, 먹 농도를 낮추고 번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빨갛다'와는 다른 뉘앙스를 시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 조씨는 "자유로움이야말로 한글의 최대 매력"이라고 말했다.
한글날인 9일 경복궁 홍례문 앞에서 열리는 전시회 '한글, 꿈을 꾸다'에 조씨는 다른 작가 70여명과 함께 출품한다. '햇빛을 꿈꾸는 글꽃'이란 제목의 조씨 작품은 단순한 손글씨가 아니다.
가로ㆍ세로 각각 50㎝ 안팎 크기의 화선지에 조씨가 쓰고 오려낸 '꽃'이란 글씨 50여개를 붙이고 그 위에 붓으로 '햇빛을 꿈꾸는 글꽃'이라고 쓴 작품은 한글의 조형미를 입체적으로 구현한 동시에 빛의 세기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풍기도록 설계됐다.
조씨는 "꽃이 시간 속에 피고 지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그동안 손글씨 작업에서 볼 수 없었던 실험적 시도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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