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지음, 랜덤하우스 코리아 발행··228쪽·1만원)
한여름의 강렬한 햇볕이 여유로운 햇살로 변하는 계절 가을은, 청년기의 뜨거운 열정 대신 인생에 대한 좀더 깊어진 안목이 생기는 중년에 종종 비유된다.
유려한 표현으로 여성의 내면을 세심하게 통찰하는 작품세계를 선보여온 오정희(62)씨의 새 소설집은 아예 <가을 여자> 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1990년대 발표했던 콩트와 미발표작 등 25편을 한 곳에 모았다. 가을>
화자들은 처녀 적의 활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얄팍한 가계부를 넘겨가며 내집 마련, 시부모 봉양, 자식교육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생활의 때가 묻은 평범한 중년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직장 상사와 마누라의 억압에 찌들어 익명의 사회인이 되버린 사내들도 등장한다. 인생의 권태로움이 슬슬 남의 일 같이 여겨지지 않는 이들 중년 남녀의 일상을 깨뜨리는 작은 사건들, 그로 인한 마음의 파장이 작품의 결을 이룬다.
화자들의 마음에 작은 물결을 일으켰던 사건들이 무겁지 않은 반전을 통해 전환되는 과정은 마치 오 헨리의 단편을 읽는 듯 씁쓸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남편과 사별한 뒤 레이스 뜨개 장식품을 만들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 아이들에게 친절한 스물여섯 살 동네 청년의 관심에 마음이 설레지만, 알고 보니 그 청년은 망상증 환자로 밝혀진다.
('그 가을의 사랑') 미래를 담보했던 젊은 시절은 끝나고 남루하고 초라한 모습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우울한 중년 사내. 어느 비오는 날 비를 긋기 위해 들어간 찻집에서 우연히 20년 전 펜팔 상대였던 여성을 만난다.
살가운 그녀의 인사에 옛사람을 만나면 환멸뿐이라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닌가 보다 하며 가슴이 뛰는데, 그녀가 꺼낸 보험계약서를 보고 부끄러움과 배반감을 느낀다.('비오는 날의 펜팔')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의 나이 들어가는 얼굴을 보고 안도감을 느끼는 사내나, 춥고 초라한 음악회를 다녀온 뒤 거리에 나서 값싸게 취급받고 모욕당한 기분을 느끼는 독신 여성 등 진자 처럼 마음이 흔들리는 중년들의 심리 묘사는 일품이다.
막 중년에 들어서는 여성들에 대한 조언으로 오씨는 "삶이란 맞닥뜨려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것"이라며 "직장과 가정생활에서 우리 때보다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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