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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상봉의 Fashion & Passion] <18> 한글의 진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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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상봉의 Fashion & Passion] <18> 한글의 진화를 꿈꾸며

입력
2009.10.07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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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한글이 세계적으로 훌륭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글은 인류가 만든 문자들 중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문자다. 그만큼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다.

이렇게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도 우리 스스로는 이상하리만큼 한글을 가볍게 대접한다. 예전부터 한글보다는 한자를, 요즘 들어서는 영어를 더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한글을 이제껏 갈고 다듬기 보다는 그대로 모셔두기만 한 것 같다.

나는 수년 전부터 '한글 스타일'을 이용한 패션 디자인 작업을 해왔다. 스타일이라는 말에는 '디자인'이라는 뜻과 '멋지다'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과연 한글은 멋진가? 내가 굳이 '한글'에 외래어인 '스타일'이란 말을 붙인 건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젠(Zen)스타일'처럼 밖에서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한글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글은 충분히 그만큼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나도 '한글 스타일' 패션 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한글로 처음 작업한 계기는 전혀 우연이었다. 외국에서 패션쇼를 하다 보니 우리 것을 더 찾게 됐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한글'이 떠올랐다. 당시 내게는 자필로 편지를 보내준 장사익과 임옥상 선생님의 글들이 있었다.

그 글들을 다시 꺼내 보면서 이런 글씨를 패션에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그 분들의 동의를 얻어 2006년 2월 파리 컬렉션에 처음으로 한글이 들어간 작업을 발표하게 되었다.

물론 나도 처음엔 주저했고 스텝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낯선 작업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옷의 일부분 아니면 안쪽에 한글 프린트를 살짝 넣어볼까 고민하던 중 오히려 외국 친구들의 칭찬에 용기를 얻어 과감하게 모든 컬렉션에 한글을 프린트해 넣었다.

컬렉션이 끝난 후 현지에서의 반응은 놀라웠다. 파리 일간지인 르 파리지앵 1면에 곧바로 컬렉션에 대한 소개와 함께 한글이 들어간 옷이 실렸고, 유명 방송매체와의 인터뷰도 이어졌다.

여기서 용기를 얻어 서울로 돌아와 곧바로 '한글, 달빛 위를 걷다'라는 타이틀로 첫 한글 패션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는 '이상봉과 친구들'이란 부제아래 컬렉션에 선보인 한글 패션과 도움을 주셨던 임옥상과 장사익 선생님의 서체들, 그리고 남궁환씨의 그림이 함께 전시되었고 아트디렉터인 김치호씨가 설치를 맡았다.

그 해 가을 파리 '후즈넥스트'와 '프러미에르 클라스'라는 곳에서 '한글 패션 프로젝트'라는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상무관이었던 오현숙씨가 파리 패션 전시기획자인 패트리샤 르하를 소개해 줘 전시기획에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전시는 지금껏 내가 한글 작업을 하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전시에는 나를 포함 45명의 유럽 디자이너들의 한글 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이었다. 개막 전날 밤 12시경 나와 오현숙씨는 전시장에 머물며 작품들을 기다렸다. 드디어 외국 디자이너들이 한글 프린트를 가지고 만든 각양각색의 작품들이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그 때의 벅찬 감동과 울컥했던 마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먼저 한글을 존중하며 작업한 흔적이 역력한 그들의 성의에서 감동을 받았고, 곧이어 왜 이렇게 좋은 한글 패션 전시가 우리나라가 아닌 파리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이어졌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나의 한글 작업은 계속돼 오고 있다. 여러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기도 했는데, 의상뿐만 아니라 도자기, 핸드폰, 다이어리, 침구류, 아파트, A1 자동차까지 한글이 들어간 디자인을 해왔고, 린제이 로한, 줄리엣 비노쉬, 김연아 등 세계적인 스타들에게도 한글을 입힐 수 있었다.

특히 얼마 전 행남자기와 협업해 디자인한 윤동주의 '서시'를 넣은 생활 도자기가 영국 왕립 박물관에 영구히 전시 된다는 소식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올 봄 주영한국문화원의 개관 1주년 기념행사로 진행한 '한글=마음, Hangul=Spirit' 전시를 찾은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 큐레이터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디자이너인 내가 한글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은 결국 디자인을 통해서다. 한글작업 초기에는 서체를 개발해 이를 프린트로 이용해 패션에 적용하는 1차적인 작업을 진행해 왔다면, 지금은 한글을 해체하거나 다시 조립하고 거기에 컬러를 입혀가면서 새로운 한글의 조형적인 '진화'에 몰두하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글이 아름답다?것을 알리기 위해 패션에 접목을 시도했고 기업과의 협업도 진행해 왔는데, 이런 노력들이 쌓여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글 스타일'도 만들어 지지 않을까.

낼 모레면 또 다시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공포한 지 올해로 벌써 563돌이나 되었다. 나는 내가 한글을 위해 무엇을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한글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짧게나마 해온 한글 작업으로 인해 사랑을 받았다면 그 모든 공적은 내가 아닌 오랫동안 조용히 한글을 사랑해온 드러나지 않은 더 많은 분들에게 돌려야 될 것이다.

그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며 나의 작업에 협력해준 기업들, MBC 최재혁 부장, 고은 선생님 그리고 서예가 조성주, 김지수씨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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