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전 6시, FM라디오 주파수를 100.7MHz에 맞추자 1950년대 유행가 '만리포 사랑'이 시그널 음악으로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곧 뒤를 잇는 DJ들의 오프닝 멘트. "새벽 바람이 차가운 것이 정말 가을이 온 것 같아요." 여성의 목소리는 은은하면서 맑았다. "맛있는 냄새 때문에 가을의 정취를 더 느끼는 것 같아요."낮게 깔리는 남성의 목소리는 중후하면서도 은근슬쩍 익살끼도 담겨 있다.
"연 선생님, 신수가 좋아지셨어요"(여성 DJ) "그러게 말입니다. 말도 살찌고 저도 살찌는 요즘입니다." (남성 DJ). 아침을 깨우는 두 DJ의 대화는 토닥거리는 연인이나 부부 같다.
"건강에도 유의하셔야죠. 지난주 건강상식에서 배운, 물 많이 드시는 것은 잊지 않으셨죠?"(여성 DJ) "훌쩍, 이렇게 한 컵 들이켜면 되는 거죠? 영자씨 잔소리가 부쩍 늘었단 말이에요." "어머, 이게 왜 잔소리예요. 다 선생님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요." "그래요, 나 챙겨주는 건 우리 영자씨밖에 없어." 두 DJ의 정담 뒤로 현인의 '신라의 달밤', 남일해의 '빨간구두 아가씨' 등 아련한 옛 트로트 가요들이 세월을 잊은 듯 이어졌다.
서울 마포구 지역에 매주 수요일 아침이면 라디오 전파를 타고 찾아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영자(69) 할머니와 연제은(71) 할아버지. 2005년 마포 지역 주민들의 손으로 개국한 지역공동체 방송 '마포FM' (www.mapofm.net)의 실버 프로그램 '행복한 하루'의 명콤비 DJ들이다.
이들은 청춘의 꿈을 뒤늦게 이룬 늦깎이 아마추어 방송인이지만, 마포 FM 개국 멤버로서 벌써 4년째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이다. 매일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 동안 방송되는 '행복한 하루'를 번갈아 진행하는 4개 실버팀 중에서도 가장 활동을 오래해 고정 청취자가 적지 않다.
이날 오후 마포구 동교동에 자리잡은 '마포FM' 방송국에서 만난 두 어르신들은 라디오 방송처럼 유쾌하면서 정다웠다. "핑크색 옷을 입으니까 오늘 따라 더 예쁘네. 안 그래도 예쁜데 화장은 왜 고쳐요?"(연씨) "카메라 왔는데, 예쁘게 하는 게 예의죠."(박씨) 연씨의 은근한 농담에 박씨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엔 연신 소녀 같은 웃음이 가득했다.
이들 콤비의 방송은 장난기 어린 수다로 가득하다. 연씨가 "연애할 때 하는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예요"라고 '인생 교훈'을 설교하면, 박씨는 "그럼 저한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거짓말이셨다는 거예요?"라고 되받으며 아웅다웅하는 식. 그 수다는 그러나, 젊은 시절 추억에서 60여년 삶의 무상함과 노년의 생활까지 어우러져 어느 라디오 방송보다 웅숭깊다.
방송국 반경 5km 이내 마포와 서대문 일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출력 방송이지만, 두 어르신은 어엿한 '라디오 스타'들이다. 연씨는 "청취자들 중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 와서 한 번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는데, 다들 40~50대인 줄 알았더니 나이가 많아서 놀랐다고 하더라"며 환하게 웃었다.
박씨는 "노인복지관 친구들이 '방송 재미있게 듣고 있다'는 얘기를 수시로 해줘서 힘이 난다"며 "방송을 듣다 보면 옛날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좋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각각 기업체 컨설턴트로, 행정직 공무원으로 반평생을 보낸 뒤 은퇴한 연씨와 박씨는 2005년 가을 마포노인종합복지관에 나붙은 '라디오DJ 구함'이란 공고문을 보면서 젊은 시절의 꿈을 다시 지폈다. 뒤늦게 이룬 꿈이다 보니 열정은 더없이 뜨겁다. 무보수의 자원봉사지만, 4년 동안 방송을 거른 적이 한 번도 없다.
박씨는 "일주일에 한 시간 나가는 방송이지만, 평소에도 신문과 책을 꼼꼼히 챙겨 읽으면서 모든 생활을 방송 준비에 할애한다"며 "초등학교 4학년 손자가 우리 할머니는 모르는 게 없다며 자랑스러워할 때면 '내가 아직 필요한 존재구나' 싶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행복한 하루' 담당 PD 박상미(26)씨는 "두 분은 방송뿐 아니라 마포FM 총회 등 관련 모임에도 가장 참여율이 높다"며 "젊은 사람보다 에너지가 더 넘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덩달아 힘이 난다"고 말했다.
지역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은 '마포 FM'을 비롯해 전국에 모두 7개. 2005년 정부 시범사업으로 시작됐으나 올해 1월부터 정부 지원금이 끊기면서 지역 광고 등을 통해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마포 FM' 관계자는 "지역공동체 라디오의 생존은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에 달려있다"며 "어르신들의 열정이 마포 FM을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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