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예슬(24·여)씨에게 없는 건 돈과 집, 행복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명절'이란 것도 없었다. 갓난 아이 때부터 뿔뿔이 흩어졌던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과 할머니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했다. 겨우 20대 꽃다운 나이에 노숙 생활을 거듭하며 산전수전을 겪은 정씨가 올해 처음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고향으로 향했다.
귀성길에 오르기 전인 1일 오전 11시 정씨는 서울 관악구 신림본동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인'나자로의 집'에 있었다. 장애인 30여명과 함께 샴푸뚜껑 조립, 봉투접기, 방패연 포장 등의 작업을 거들어주는 게 그의 일이다.
아직 돌도 안된 둘째 아이를 옆에 두고 작업을 하는 정씨는"서울에 있는 아버지를 모시고 남편과 함께 광주로 내려가기로 했다"면서 "TV에서 보면서 부러워했던 걸 이제야 해본다"고 말했다.
정씨는 6월부터 서울시가 실시하는 희망근로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12개 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서 장애인의 일을 돕는 업무이다. 아침 일찍 첫째 아이(5세)와 둘째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 뒤 오전9시부터 오후5시까지 단순조립 작업을 하고 있다. 월급은 75만원. 작은 돈이지만 그녀에겐 새로운 희망을 쌓아가는 값진 수입이다.
지난 4월 봉천동의 노숙자쉼터에 들어가 희망근로사업을 소개받기 전까지 정씨에게 최근 몇 년간은 거리가 집이나 다름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빠 엄마가 가출하셨죠. 할머니와 살다가 중학생때 상경해 온갖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열 살이나 많은 아저씨를 만나 같이 살았다. 그때 나이 열 아홉. 의지할 곳 없던 그녀에게 힘이 돼 줄 것 같았던 아저씨는 2005년 6월 첫 아이가 태어나던 날 병원에서 과일 사러 간다며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정씨에게 아기를 어떻게 키웠냐고 묻자 금세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헌 옷들을 구해 기저귀로 만들고 분유 살 돈이 없어서 외상도 수시로 했어요. 미혼모시설을 찾아 인천에 갔다가 다시 도망 쳤습니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이 허리를 다쳐 일을 못한 뒤로 1년간 PC방에서 일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거기서도 쫓겨난 뒤엔 지하도에서 아이를 끌어안은 채 밤을 새웠다.
하지만 희망근로사업에 참여하면서 정씨는 새로운 삶의 출발선에 섰다. 꼬박꼬박 저축을 하면서 2011년까지 임대아파트 입주자격을 따겠다는 목표도 생겼다. 헤어졌던 가족들에게 다시 모이자고 연락도 했다. 할머니께 드릴 용돈도 처음으로 마련했다. "나중에 근사한 노숙인 재활시설을 만들고 싶어요. 밖에서 자는 아이들을 보면서 당장 따뜻한 밥 한끼라도 주고 싶었어요."
일을 마친 그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헤어날 수 없었던 가난과 외로움, 절망도 이젠 떨쳐버린 것 같았다.
"짧은 연휴라 송편을 빚을 여유까지는 없지만 20년만에 모이는 가족들이라 한 상에 둘러앉아 밥만 먹어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한가위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보려고 합니다."
정씨를 보며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이 풍성한 보름달로 보였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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