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객(呼客)은 장사의 기본. 한가위(3일)가 목전에 다가올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고객은 영 마뜩하지 않다. 귀는 윙윙거리고 정신은 심란하니 말 많은 판매상은 부러 슬슬 피하게 된다.
명절대목에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한 상인들의 외침으로 백화점은 숫제 도떼기시장. 그런데 애써 꼬드기지 않아도, 그저 서있기만 해도 고객의 발걸음을 좌판 앞으로 끌어당기는 판매상이 있다.
한가위를 맞아 백화점들은 이 '특별한 판매상'을 전격 투입하기에 이른다. 일단 뜨기만 하면 10원어치 팔 걸 50원어치나 팔기 때문. 어떤 상술을 지녔길래 존재 자체만으로 명절 쌈지를 유혹하는 걸까.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그윽한 첼로 선율에 취하고
최근 첼로 음률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식품관을 감싸 안는다. 백화점에서 클래식 CD라도 틀었나 싶은데, 아니다. 된장 매장엔 라이브 첼로연주가 한창이다. 일면 불협화음처럼 느껴지는 '된장과 첼로'는 전직 첼리스트 도완녀씨의 손길을 따라 정갈한 하모니로 빚어지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연주가 끝나자 박수와 더불어 된장이 팔려나간다. 평소보다 5배 가까이 많은 규모, 한꺼번에 서너 개를 사가는 고객도 있다. 팔을 걷어붙인 도씨도 첼로를 놓고 손님을 맞는다.
된장 팔 요량으로 첼로를 배웠거니 여기면 오산. 도씨는 서울대 음대 졸업, 독일 유학(뤼벡음대), 충남대 교수 등의 경력을 지닌 정통 첼리스트다. 집(강원 정선군)에서 담가먹던 장맛이 유별나다는 지인들의 입 소문 덕에 몇 년 전 '메주와 첼리스트'라는 된장 브랜드를 내고 사업을 시작했다. 주객이 전도된 셈.
그의 장은 익어가면서 첼로연주까지 듣는다고 하니 장 중에선 상팔자다. 덕분에 맛도 깊고 곱단다. 1년에 4회 정도 백화점을 찾는 도씨는 첼로연주 외에도 고객들에게 장을 맛있게 먹는 방법, 된장 빚는 얘기, 정선의 풍광을 들려준다. 장맛 선율 재담 3박자에 취한 강남 사모님들은 그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린단다.
#미소 머금은 합장에 감읍하고
가사를 걸친 비구니들이 사바(娑婆)의 귀퉁이 백화점에 왔다. '사봐 사봐!'를 외치는 왁자지껄한 틈바구니에서 중생을 교화할 목적은 아닐 터. 직접 만든 사찰음식을 소개하기 위해 주요 백화점은 빠뜨리지 않고 다닌다. 경북 봉화군 고계암의 묘관 스님 일행이다.
묘관 스님은 30년 수행의 곁가지로 터득한 전통음식 솜씨가 유명세를 타면서 수시로 산사를 내려오게 됐다. 손수 빚은 전통 장으로 담근 장아찌(고추 매실) 마늘종 등은 감칠맛이 압권이라 실속 있는 한가위선물로 그만이라는 평을 받는다.
판매실적은 친절교육, 판매노하우 등을 다년간 갈고 닦은 일반 직원보다 2~3배, 많게는 4~5배 높다는 게 각 백화점의 설명. 스님 일행이 그저 법문 읊듯 "장작불 때어 무쇠가마솥에서 콩을 삶아 황토 온돌방에 메주를 띄운다"는 설명만 해도 고객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지경이란다. 수익금은 결식아동 돕기에 쓰인다.
신심(信心)의 발로일까. 스님들을 모시기만 하면 관련제품뿐 아니라 식품관 전체 매출이 뛴단다. 실제 롯데백화점은 올해 본점 식품관 매출이 전년보다 17%나 늘어난 시점을 따져보니 스님 일행의 행사기간과 맞아떨어졌다는 결론을 내고, 다른 점포에서도 비슷한 행사를 연거푸 열었다. "스님들이 언제 다시 오시느냐"는 고객들의 문의가 많아 신세계 현대백화점도 행사를 거르지 않고, 확대하고 있다.
#종부, 식객, 달인들 그리고…
법도와 얼이 서린 지엄한 종가 종부(宗婦)들의 백화점 나들이도 잦아졌다. 360년 비법을 담은 담양 고씨 문중의 10대 종부 기순도, 보성 선씨 영흥공파 21대 종부 김정옥씨가 대표적이다. 전통방식 그대로 장을 담그는 명인을 판매현장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소비자는 흐뭇하다. 이들의 이름을 내건 추석선물세트도 앞다퉈 나왔는데, 종부가 상경하는 날이면 매출이 훌쩍 오른다.
만화 <식객> 의 작가 허영만 화백도 특별한 판매상으로 꼽힌다. 8월 열린 '와인 식객 프로젝트'에서 관련와인이 하루 만에 200병(전년동기 150% 신장) 팔리자 롯데백화점은 허 화백의 조언을 받아 매달 정기적으로 각 요리에 걸맞은 '식객 와인'을 소개하고 있다. 식객>
방송프로그램 '생활의 달인' 출연자들도 거리를 벗어나 백화점에 출연하고 있다. 호현종(철판순대볶음) 이규남(어묵, 햄 꼬치) 백계원(혼합강정) 기동식(다코야키) 전현철(닭 꼬치) 등이다. 이들의 신들린 솜씨를 보기 위해 롯데백화점을 찾은 고객이 평소보다 20% 늘자 다른 백화점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우동숙 신세계 바이어는 "특히 식품은 워낙 종류가 많아 스토리나 희소성이 없으면 고객에게 호소하기 어려워 특별한 판매상의 비중을 늘리고 있다"고 했다. 임순철 롯데 노원점 식품팀장은 "신뢰감과 볼거리를 제공해 인기가 높은 이색 판매상은 명절대목의 일등공신"이라고 했다. 앞으로 신부님이 파는 와인, 화가가 파는 이색과일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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