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대구국제육상경기대회가 열린 지난 25일 대구스타디움. 남자 100m 레이스가 끝난 직후 스탠드에 앉아 있던 한 중년신사는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깨져도 진작 깨졌어야 했는데 오늘도…."
'원조 총알 탄 사나이' 서말구(53ㆍ해군사관학교 교수)는 30년 전인 1979년 9월9일 멕시코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100m에서 10초34로 한국기록을 세웠다. 서말구가 한국기록을 세운 지 올해로 31년째가 되지만 10초34는 여전히 '철옹성'으로 남아 있다. 세계기록(9초58ㆍ우사인 볼트)과는 거의 1초 차이가 난다.
서말구 교수는 "모래 위에 새겨야 하는데 바위 위에 새기고 있어"라는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기록이라는 게 모래성처럼 허물어져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한 번 기록이 나오면 바윗돌처럼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 독한 놈이 돼라
현역 시절 서 교수는 '독한 놈'으로 통했다. 정해진 훈련만으로 성에 안 찰 때 '달밤의 체조'는 기본이었다. "아침부터 죽어라 뛰었는데 맘에 안 들더군요. 그래서 밤 12시 넘어서 스파이크 신고 트랙으로 달려갔어요. 다리가 풀릴 때까지 뛰고 또 뛰었습니다."
서 교수는 후배들에게 "독한 놈이 돼라"고 주문했다. "고생을 싫어하는 요즘 사회적 분위기가 운동장으로도 이어지는 것 같아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맛도 있어야 하는데 적당히 하다가 마는 경우가 많아요."
■ 가르치는 보람
서 교수는 1987년부터 해군사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올해로 경력 23년째의 베테랑 '교수님'이다. 서 교수는 운동할 때보다 교단에 서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운동할 때는 자신이 중심이지만 가르칠 때는 학생이 중심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일반 체육대학처럼 전문 운동선수를 양성하지는 않습니다. 해군장교로서 강한 체력과 근성을 기르는 게 목표죠. 생도들이 졸업한 뒤에 찾아와서 '학교 다닐 때 교수님에게 수업 받은 게 도움이 된다'며 음료수 한 박스 사 들고 올 때 보람을 느낍니다."
■ 롯데의 추억
서 교수는 84년부터 86년까지 3년간 프로야구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선수가 아닌 트레이닝 코치였다. 서 교수는 "미국 유럽 등지에서는 육상선수 출신을 트레이닝 코치로 기용하는 경우가 많다. 히딩크 감독도 육상선수 출신들을 트레이닝 코치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롯데에서 3년간 몸담을 때 야구선수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특히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역전 3점 홈런을 날렸던 유두열씨와는 지금까지도 가깝게 지내고 있다. "롯데에 있으면서 평소엔 태릉선수촌에서 얼굴만 알았던 선수들과 가까워졌어요. 두열이랑은 이따금 만나기도 하고 연락도 주고받습니다."
■ 독한 놈을 기르고 싶다
"한국육상이 침체됐다는 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넋두리만 하고 앉아 있다고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구육상대회처럼 초청대회도 더 많이 유치하고 선수 발굴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교단에 선 지 23년째지만 서 교수의 마음은 여전히 트랙 위에 있다. 언제든지 한국육상 발전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돼 있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때 서 교수는 국가대표 총감독을 맡긴 했지만 명예직에 가까웠다. "제가 선수 때 별명이 독한 놈 아니었습니까? 기회가 된다면 독한 놈들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운동은 독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거든요." 서 교수의 말끝에 힘이 실렸다.
대구=글·사진 최경호 기자 squeez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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