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차례에 우리는 언어학자 두 사람에 대해 아주 짧게 알아보았습니다. 기억나시죠?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노엄 촘스키 말입니다. 오늘은 이 두 사람이 제가끔 다듬어낸 용어 몇 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용어들의 원적지는 언어학이지만, 이내 인접과학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퍼지는 과정에서 때론 은유의 옷을 입기도 하고 때론 뜻빛깔의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그 개념의 고갱이는 오롯이 남았습니다.
여기, "지난번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돋보였던 사람은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야!"라는 소리뭉치가 있습니다. 한국어 화자 열 사람에게 이 문장을 소리내어 읽게 하고 그 소리 연쇄를 소노그래프로 분석하면, 그 소리연쇄 열 개가 매우 비슷하되 똑같진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똑같은 사람이 이 문장을 열 번 소리내어 읽더라도, 민감한 소노그래프라면 그 소리연쇄들이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겁니다.
이것은 낱말이나 형태소(의미를 지닌 최소의 소리뭉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라는 형태소(우연히, 낱말이기도 하군요)를 열 사람이 제가끔 소리내어 읽을 때, 그것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소리들로 실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 '사람'이라는 말을 열 번 되풀이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형태소의 소리값은 흔히 [sa:ram]으로 표기되지만, 언어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수많은 [sa:ram]이 똑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더 세밀한 음성기호 체계를 지니고 있다면, '사람'이라는 형태소가 [sa:ram]과 비슷하되 똑같지는 않은 무수한 변이체들로 실현되는 것을 일일이 구별해 기록할 수 있을 겁니다.
제 말이 또렷하지 않은가요?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경상도 방언 사용자가 소리내는 '사람'과 경기도 방언 사용자가 소리내는 '사람'은 물리적으로 똑같을 수 없다, 경기도 방언 화자들끼리도 '사람'이라는 말을 똑같이 소리내지는 않는다, 남자가 내는 '사람'이라는 소리와 여자가 내는 '사람'이라는 소리는 다르다, 어린이가 내는 '사람'이라는 소리와 어른이 내는 '사람'이라는 소리는 다르다, 다급할 때 내는 '사람'이라는 소리와 한가할 때 내는 '사람'이라는 소리는 다르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사람'을 두 번 되풀이할 때도 그 소리들은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사람'이라는 말이 한국어 화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소리들로 실현된다면, 또 같은 사람이라도 '사람'을 똑같이 되풀이할 수 없다면, 언어를 통해 의사를 주고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로써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어 화자의 머리 속에는 [sa:ram]의 무수한 변이체들을 추상한 {sa:ram}이 그 개념과 함께 저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기도 방언 화자의 [사람]과 이와는 '물리적으로' 다른 경상도 방언 화자의 [사람]을 똑같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앞에서 예로 든 "지난번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돋보였던 사람은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어 화자들은 이 문장을 비슷하되 서로 다른 소리들로 실현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화자의 머리 속에는 서로 다른 [지난번] [인사청문회] [에서] [가장] [돋보였던] 따위가 추상된 {지난번} {인사청문회} {에서} {가장} {돋보였던} 따위가 그 개념과 함께 저장돼 있고, 그 개념들이 모이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사회적 규약이 갈무리돼 있습니다.
소쉬르는 물리적으로 서로 다르게 실현되는 구체적 [sa:ram](들)을 '파롤'(parole)이라고 부르고, 우리 머리 속에 갈무리돼 있는 추상적 {sa:ram}을 '랑그'(langue)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둘을 아울러서 '랑가주'(langage)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랑그'는 언어공동체가 받아들이고 있는 기호체계를 가리키고, '파롤'은 의사를 주고받기 위해 랑그를 사용하는 개인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랑그가 언어활동의 체계적이고 사회적인 부분이라면, 파롤은 언어활동의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부분입니다.
화자의 머리 속에 '기억'의 형태로 갈무리돼 있는 '랑그'를 의지에 기대어 '파롤'로 실현시키는 것이 언어활동이라면, '랑그'가 수동적인 데 비해 '파롤'은 활동적이고 창조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는 언어활동의 이 두 측면 가운데 '엄밀한 의미의 언어학'이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랑그'라고 말했습니다. 소쉬르가 '파롤의 언어학'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만 '랑그의 언어학'이라는 길과 '파롤의 언어학'이라는 길을 동시에 걸을 수는 없으며, '랑그의 언어학'이 언어학자가 걸어야 할 간선도로라고 본 것입니다.
소쉬르의 '랑그'와 '파롤'은 촘스키가 구별한 '언어능력'(competence)과 '언어수행'(performance)에 제가끔 얼추 대응합니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사람들이 제 모국어를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암묵지(暗黙知ㆍtacit knowledge)를 지녔다고 전제합니다.
이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앎을 촘스키는 '언어능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능력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반면에 '언어수행'은 언어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용을 가리킵니다. 언어능력은 언어수행을 규제합니다. 변형생성문법의 일차적 관심은 언어능력을 해명하는 데 있습니다. 변형생성문법은 소리와 의미를 잇는 규칙 집합을 통해서 이 능력을 해명하려 합니다.
현대중국어학을 전공한 뒤 소위 체계구조이론(system-structure theory)과 사회기호학(social semiotics)의 주춧돌을 놓은 잉글랜드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 언어학자 마이클 핼리데이(1925~)를 비롯해서 몇몇 영국계 언어학자들은 언어수행 연구가 언어의 본질을 캐는 길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주류 변형이론가들은 언어수행을 언어학의 부차적 공부거리로 여깁니다.
언어능력이 문법성(grammaticalness)의 바탕이라면 언어수행은 가용성(可容性ㆍacceptability)의 바탕입니다. 문법성이란 모국어 화자들이 적격(well-formed)이라고 인정하는 정도이고, 가용성이란 어떤 발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정도입니다.
문법적 문장이라고 해서 모두 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법성은 가용성을 결정하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널 사랑해!"는 완전히 문법적인 문장이지만, 청자가 화자의 할머니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 같진 않군요.
그런데 소쉬르의 랑그/파롤과 촘스키의 언어능력/언어수행은 고스란히 포개지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스란히 포개진다면 촘스키가 소쉬르의 이분법을 그대로 가져다 썼겠지요. 랑그/파롤과 언어능력/언어수행이라는 두 이분법의 차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언어활동의 창조성을 보는 관점일 겁니다.
소쉬르는 언어활동의 창조성이 (구체적인) '파롤'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지만, 촘스키는 그것이 (추상적인) '언어능력'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습니다. 촘스키는 소쉬르가 '파롤'을 언어학의 변두리로 몰아낸 것 이상으로 '언어수행'을 언어학의 가장자리로 밀어낸 것입니다.
소쉬르의 다른 용어를 잠깐 살핍시다. 언어학 개론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시니피앙' '시니피에'라는 말은 들어보았을 겁니다. 소쉬르는 언어기호(signe linguistique)의 두 측면을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 용어는 '의미하다'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signifier)의 현재분사와 과거분사를 각각 명사화한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하면 '시니피앙'은 언어기호의 소리 측면이고, '시니피에'는 뜻 측면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니피에만이 아니라 시니피앙도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정신적 실체라는 점입니다.
소쉬르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면 '시니피앙'은 '소리연쇄'가 아니라 '청각영상'입니다. 즉 (마음속의) 소리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시니피에'는 '개념'입니다. '개념'과 '청각영상'이 결합해서, 말을 바꾸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결합해서 언어기호를 이룹니다.
소쉬르는 언어기호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째는 자의성(恣意性)이고 둘째는 선조성(線條性)입니다. 기호의 자의성이란 특정한 시니피앙과 특정한 시니피에의 결합에 아무런 내적 필연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牛'라는 시니피에가 한국어에서는 {s-o}(소)라는 시니피앙과 결합하지만, 독일어에서는 {o-k-s}(Ochs)라는 시니피앙과 결합합니다. 선조성은 기호 전체의 특성이 아니라 시니피앙의 특성입니다. 시니피앙은 그 청각적 본질 때문에 시간 속에서 전개되며 , 따라서 선(線)의 특성을 갖는다는 거지요.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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