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조사2국 고위직(2급) 출신인 A씨는 지난해 H증권 감사로 자리를 옮겼다. 증권사 감독 업무를 맡던 터여서 공무원 대상의 '퇴직 후 취업제한' 규정에 저촉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정부는 취업을 승인했다. A씨가 소속된 팀이 H증권 업무를 직접적으로 맡지 않아 문제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퇴직 공무원이 취업시 공직에서 취득한 정보 등을 사기업 이익에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퇴직 후 취업 제한' 규정을 시행하고 있지만, 유명무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적격여부 심사 통과율이 무려 96%나 돼 관련 규정을 무색하게 했으며, 특히 '취업 관문'을 가볍게 통과한 퇴직 공무원 대부분이 4급 이상 고위공직자 였다.
이 같은 사실은 행정안전부가 4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소속 정갑윤(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퇴직 공무원 재취업 현황' 자료를 본보가 분석한 결과 확인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올해 8월까지 5년 여 동안 '퇴직 후 취업 제한' 규정이 적용돼 취업적격심사를 신청한 퇴직 공무원은 총 908명이었으나, 이 가운데 무려 96%인 876명에 대해 정부가 취업을 승인했다. 취업 제한에 걸린 경우는 단 4%(32명)였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은 '공무원이 퇴직 전 3년간 맡았던 업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자본금 50억원 이상, 연매출 150억원 이상의 기업에는 퇴직 후 2년간 취업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정부는 취업적격심사를 신청한 퇴직공무원에 대해 공직자윤리위원회 심사를 거쳐 취업을 승인하고 있다.
취업 관문을 쉽게 통과한 퇴직 공무원 중 4급(서기관) 이상 고위직이 전체의 84%(734명)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는 퇴직한 고위공무원 10명 중 8명 이상이 사기업 등 유관기업 재취업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4급 이상 가운데 이직한 업체에서의 직급 및 직무를 고려할 때 이전에 근무하던 부처와의 연관성이 있다고 의심할 만한 경우도 45%(330명)에 달했다.
부처별로는 사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103명과 공정거래위원회 출신 20명 전원이, 국방부는 이직자 97명 중 96명(99%), 감사원은 40명 중 33명(80%)이 4급 이상이었다.
전문가들은 퇴직 공무원 대상의 취업 제한 규정 취지를 살리려면 직무 연관성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행 법령이 '취업한 기업체의 재산상 권리에 직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업무'로 직무 연관성 범위를 좁혀 놓는 바람에 대다수 퇴직 고위직들이 취업 제한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윤태범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현행 공직자 재취업 제한 규정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라며 "관련 규정을 현실에 맞게 강화해야 하며 정부 심사도 좀 더 까다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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