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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상 50년-책, 미래와의 대화] <16>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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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상 50년-책, 미래와의 대화] <16>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입력
2009.10.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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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7일 런던 중심가의 출근시간대 버스와 지하철에서 발생한 연쇄 폭탄테러. 50명 이상이 사망하고 700명이 넘게 부상한 이 테러는 영국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테러 용의자 무슬림 청년들이 해외의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아니라,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아온 청년들이었기 때문. 이후 영국에서는 무슬림들에 대한 보복 테러가 이어졌고, 무슬림들은 도심지 건물에 '백인 접근금지'라는 팻말을 내걸기도 했다.

이 사태는 다양한 인종·종교 집단의 문화를 인정하겠다는 영국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정책의 적실성에 대한 논란을 가열시켰다. "우리는 몽유병자처럼 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트레버 필립스 영국 평등인권위원회 의장의 발언은 당시 영국사회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한국 역시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유학생 등 체류 외국인이 이미 2007년에 100만명을 돌파하면서 다문화사회로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류학, 사회학, 여성학을 중심으로 다문화주의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정부 각 부처는 다문화주의의 이름 하에 다양한 정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다문화주의의 전통이 강한 서구사회는 급격한 문화적 변동의 과정에서 어떻게 다양한 구성원들을 통합해 갔을까. 갈등은 없었을까.

종교 갈등으로 인한 문명충돌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타자와의 대화를 강조한 <차이의 존중> (2002)의 저자인 영국 철학자 조너선 색스(61)는 <사회의 재창조> (원저 2007년ㆍ2009년 말글빛냄 번역출간)에서 1970년대 이래 미국, 영국, 호주 등 서구사회의 오랜 독트린이었던 다문화주의의 오류를 진단하고, 날로 높아지는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다문화주의가 여전히 사회통합 원리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유대교 지도자(랍비)이기도 한 색스는 "오늘날 다문화주의는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왔다"고 선언한다.

■ 다문화주의의 기원

흔히 미국사회를 나타내는 '도가니'(melting pot)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이민자나 소수집단의 문화를 새로운 문화에 용해시킨다는 '문화동화론'은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하나의 독트린이다. 그러나 흑인들의 민권운동(미국), 대규모 이민 유입(유럽) 등 격렬한 사회변화는 1970년대부터 서구사회로 하여금 다문화주의 정책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이민자 집단이 그들만의 학교와 사회복지기관을 설립하도록 국가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공립학교는 소수집단에 연고를 둔 교사를 채용했다.

조너선 색스의 표현대로 "역사상 최초로 이민자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민자에 적응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20세기초 경험한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야기한 민족주의에 대한 극단적 반감 등도 다문화주의를 꽃피게 했다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그러나 민족적, 종교적 소수집단이 사회 공동의 언어와 정치체계를 공유하면서도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다문화주의는 전면에 부상했지만, 그와 동시에 공동의 사회적 목표 안에서 개인을 하나로 묶어주던 도덕적 유대의 끈도 끊어지기 시작했다. 종교지도자이기도 한 지은이 색스가 보기에 도덕성의 붕괴는 애초 다문화주의의 목표였던 공동체의 '공존' 대신 '분열'을 가속시키는 촉매가 됐다.

■ 실패한 '호텔로서의 사회'

색스는 이 책에서 흥미로운 비유를 통해 다문화주의의 실패 원인을 뜯어본다. 그는 다문화주의 사회를 '호텔로서의 사회'라고 비유한다. 투숙객들은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다른 호텔을 찾을 수도 있다. 문제는 투숙객들이 이 호텔에 대해 아무런 애착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투숙객들과 얼굴을 익히고 한담을 나눌 수도 있지만, 그곳에 뿌리 내릴 수는 없다. 사회로 말하자면 이는 어떤 주류문화도, 어떤 국가적 정체성도 없는 사회다.

도덕적 상대주의의 횡행, 규칙·훈육·권위·자기절제가 결여되어 있는 문화, 불안정성의 증가로 규정되는 이런 정체성의 공백기에 사회구성원들은 민족적 정체성 혹은 종교적 정체성 같은 '보다 안전한 과거의 흔적'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려 든다.

색스는 이를 '내적 도피'라고 설명한다. 비(非)유대학교에 자녀를 보낼 때 별 걱정을 하지 않았던 일반 유대 가정들이 최근에는 유대학교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다른 종교권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내적 도피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등 전통적인 정체성의 유지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있어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들 자신이 '함께하는 모두'로 여기지 않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 혹은 종교 공동체가 사회보다 우위에 서고 국가정체성이 약화되는 시대는 색스에 따르면 '야만과 암흑'의 시대다. 다문화주의는 오히려 사회의 통합이 아닌 분리를 야기시켰다는 점, 차이를 줄이는 대신 극대화시킨다는 점에서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 다문화주의는 유효한가

그렇다면 과거처럼 단일문화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색스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사회에 충심을 기울이며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 양립불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하며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그 모델은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the home we built together) 모델이다. 이 모델은 모든 사람이 외부인으로 전락하는 '호텔 모델'과는 달리 구성원들이 "나는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구체적으로 인종적·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구성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공동목표에 기여하는 사회다.

주류문화는 타문화를 자극하는 무의미한 언동을 금하도록 스스로를 엄격히 통제해야 하고, 소수문화는 주류문화의 전통을 존중할 책임을 의식하는 사회다. '동화없는 통합'과 '조화로운 다양성'은 이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다.

이현정 한국다문화센터 소장은 "평등하고 개방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고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공동체가 합의해서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색스의 주장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며 "다만 그가 대안 모델을 설명하면서 그 비유가 유대교의 것을 따르는 등 특정 종교의 원리를 보편화할 때 발생할 문제점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비록 문화적 맥락은 다르지만, 서구사회의 실패를 분석한 색스의 이론은 본격적 다문화주의 사회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한국사회에도 참고할 부분이 많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다문화주의 이론이나 정책과 관련, 이태주 한성대 교양학부 교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이민자 집단의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민자들에게 '한국 며느리가 되라'고 하는 식의 동화정책에 가깝다"며 "위로부터의 강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차원에서 문화적·사회적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화서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는 "다문화주의 사회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정책을 그저 벤치마킹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며 "이민자들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자생적으로 변화하는지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해 정책을 추진해야 하며, 자칫 문화제국주의로 변질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다원주의는 방관적 존중, 다문화주의는 적극적 존중"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다원주의(pluralism)에서 발전한 이론이다. 다원주의가 각 문화를 인정하되 각 문화가 알아서 스스로를 존중하라는 다소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다문화주의는 문화간의 적극적인 존중을 중시한다.

마르크스주의 정치사상가인 비쿠 파렉(74) 영국 헐대 교수의 <다문화주의 다시 보기> (2002)는 다문화주의 이론의 대표 저서다. 문화 간의 적극적 소통이 그 사회 전체의 문화를 풍부하게 만든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민자들의 고유문화를 방치할 경우 문화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그들의 기본권이 위협 받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이민자 문화를 보호·발전시키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담고 있다.

정치철학자인 찰스 테일러(78) 전 캐나다 맥길대 교수는 <다문화주의> (1994)에서 '존중'의 문화적 관계를 강조하며, 서구문화이건 제3세계 문화이건 상호존중에서 출발해 문화적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는 이론을 펼치고 있다.

윌 킴리카 캐나다 퀸스대 교수의 <다문화주의 시민권> (1995)은 다문화주의적 감수성을 국가나 민족 단위로 한정하지 말고 세계적 단위까지 확대해야 한다며 시민의식의 제고를 주장하고 있다.

●조너선 색스는 누구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 영연방 유대교 최고 지도자로 랍비 학교인 런던유대인대에서 랍비 서품을 받았다. <차이의 존중> 등 문화간 차이의 극복에 관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2004년 <차이의 존중> 으로 종교 부문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했으며 앞서 1995년에는 유대인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킨 공로로 예루살렘상을 받았다. 현재 영국 유대교협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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