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09년 지구는 노래방에 점령됐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노래방 간판을 볼 수 있었다. 유흥가에 노래방은 말 그대로 한집 걸러 한 집이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한 건물에 열 개가 넘는 노래방이 있었다. 노래방 간판이 없는 음식점이나 술집, 버스 안이나 심지어 배 위에도 노래방 기계는 있었다. TV 방송에서도 노래방 프로그램이 생겼고, 문명과 절연한 듯 보이는 심심산골 펜션 거실에도 노래방 기계는 있었다. 노래방 숫자와 식당 숫자로만 단순 비교해 본다면 노래를 부르는 일은 밥을 먹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20세기 가장 놀라운 발명
노래방 안에서의 시간은 노래방 기계에 부착된 시계에 의해서 흘러갔다. 거기서는 어떤 시간도 유료화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단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일보다는 노래책을 뒤지고, 찾아낸 번호들을 기계에 입력하는 일을 더 많이 했다. 어느 방이든지 노래 부르는 한 사람을 제외하면 다들 책을 뒤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계의 명령에 따랐다.
기계가 노래를 띄우면 자동으로 한 사람이 달려 나가 노래를 불렀다. 기계가 반주를 느리게 하면 느리게 불렀고, 음정을 높게 하면 높게 따라 불렀다. 심지어 어떤 기준으로 매겼는지도 모르는 기계의 점수에 절실하게 일희일비 했다. 노래방 기계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간주를 건너뛰어 시간을 절약하거나 서비스 시간을 더 달라고 떼쓰는 초라한 일밖에 없었다.
노래방 안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현란하게 번쩍거리는 조명과 귀청을 때리는 반주를 극복하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시도는 매번 성대에 심각한 손상을 입으며 좌절됐다.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건강을 위한다면 탬버린이라도 흔들 수밖에 없었다.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 감동적이라 생각하는 느린 선율 중심의 노래는 노래방에서는 죄악이었다. 노래방은 멜로디보다는 리듬을 위한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리듬 있는 노래에 쉽게 열광했다.
그 공통의 열광은 부서의 단합이라는 회식 목적을 달성하는데도 효과가 있었다. 중년의 관리자들은 노래방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깨달을수록 부서의 단합을 빨리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자연히 단순한 멜로디에 강하고 빠른 리듬, 반복적인 가사가 들어간 노래들이 노래방을 위해 만들어졌다.
강렬히 기억될 수 있는 춤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노래방에서 노래가 많이 불릴수록 창작자들은 많은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많은 노래들이 노래방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노래방은 술에 취하면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소비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산업화한 20 세기 가장 놀라운 발명의 하나였다.
영혼 없는 감정의 소비
아득한 옛날 노래방이 지구를 점령하기 전, 사람들은 반주 없이 노래를 불렀다.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는 반드시 외워야 했다. 모니터에서 흘러가는 글자들이 아닌, 자신의 기억 속에서 다시 의미화한 가사로 노래를 불렀다. 같은 노래라도 박자도 음정도, 심지어 가사도 부르는 사람마다 달랐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감점도 없었다. 그 사람이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어느 정도는 서로의 영혼을 나누는 행위였다.
노래방에 점령된 지구에서 노래는 더 이상 영혼을 위한 매체가 아니었다. 노래는 아주 빠르게 감정을 배설하고 그것과 함께 스트레스도 함께 배설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였다. 그래서 노래방의 숫자가 식당의 숫자와 비슷했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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