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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고국서 연예인 도전 나선 해외파 연습생들의 속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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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고국서 연예인 도전 나선 해외파 연습생들의 속내는…

입력
2009.09.30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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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청바지에 하얀 셔츠, 170㎝ 가까운 늘씬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그녀는 커피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주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서구 등촌도 SBS 공개홀 근처 커피점에서 만난 정모(22)씨. 그녀는 모 기획사 소속 4년차 '해외파 연습생'이다. 방금 가요프로그램 무대에서 백댄서로 출연하고 온 터라 볼이 아직 발갛게 달아있었다.

커피가 나오자 정씨의 입에서 자연스레 "I love coffee!"란 말이 나왔다. 국내 기획사의 해외 오디션에 발탁돼 한국에 온 지 4년째지만, 정씨는 "기분이 좋을 때는 아직 영어가 먼저 나온다"며 멋쩍어했다.

캐나다 벤쿠버에서 자란 이민 2세 정씨가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꿈은 가수다. 소속사가 정씨를 조만간 솔로로 데뷔시킬 계획이어서 '꿈의 실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상태다. 길고 힘들었던 연습생활이 곧 끝날 거란 생각에 자못 들떠 있는 정씨에게 '한국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2PM의 '재범 사태'를 묻자 곧 표정이 굳어졌다.

동석한 매니저가 "해외파 연예인 전체에게 화살이 돌아올까 봐 조심스럽다"고 입단속을 했지만 정씨는 "외롭고 힘든 마음을 친구에게 푸념조로 얘기한 것 아니냐. 누구나 힘들 때 투덜댈 수 있는 건데…"라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낯선 타향에서 속앓이를 했던 재범처럼, 정씨에게도 '부모님의 나라' 한국은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땅이다. 소속사가 마련해준 숙소에서 대여섯 명의 동료들과 생활하지만, 정씨는 "마음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같은 숙소 동료라도 각자 다른 스케줄과 연습 일정 때문에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렵다.

아침 8시면 일어나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 뒤, 낮에는 방송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다 다시 강남 논현동의 연습실에서 늦은 밤까지 춤 연습을 하다 지쳐 잠이 드는 '쳇바퀴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음식 적응도 쉽지 않았다. "처음 한국에 와서 김치를 물에 헹궈 먹을 정도로 매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다섯 달을 캔참치와 김만으로 견뎠는데 '유별나게 군다'는 말만 들었다."

그런 낯선 한국을 찾은 까닭은 뭘까. "솔직히 이민 2세들은 대부분 소니(SONY)나 비엠지(BMG) 같은 현지 음반사 문을 먼저 두드리죠. 하지만 동양인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모국을 돌아보게 되는 거죠." 정씨는 그러나 "단순히 돈 벌러 온 사람 취급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했다.

"어릴 때야 모국이 뭔지 모르다가, 차츰 어른이 돼 동양인에 대한 차별을 느끼다 보면 결국 모국을 찾게 되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모국에서 스타로 도약하려는 정씨의 도전은 아직 진행형이다.

같은 날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모(27)씨도 가수 데뷔를 꿈꾸는 해외파 연습생. 11세 때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간 후 올해 2월 가수의 꿈을 안고 입국한 그는 최근 고국에서 첫 좌절을 맛봤다. 남녀 혼성 3인조 그룹으로 데뷔를 목전에 두고 있다가 "춤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막판에 그룹 멤버에서 제외됐다.

연예계 문을 두드리는 최씨는 미국 하버드대 통계학과 석사과정까지 마친 엘리트였다. 어릴 때부터 꿈꿔온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최씨는 첫 좌절 후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밤에는 랩과 춤 연습에 비지땀을 흘리는 최씨는 낮에는 모 외국어고 유학반의 영어강사도 맡고 있다. 좌절의 쓴 맛을 보며 진로를 모색중인 최씨지만 이제 캐나다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인종차별이 남아있는 서양사회보다는 낯선 곳이더라도 고국이 더 편해졌다는 것이다."피부색을 바꿔서라도 서양인처럼 되려는 애들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많은 이민자들이 어릴 때부터 자식들에게 한국문화를 가르쳐요. 다른 민족에 비해 유별나요. 2세들도 그래서 한국을 잊지 않는 거죠." 이민 2세들이 자기도 모르게 '모국의 싹'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처음엔 돈 벌러 왔다가도 한국에서 지내다 보면 그 싹이 피게 된다는 얘기였다.

국내에 해외파 연예인 연습생들의 규모는 확실치 않다. 각 기획사들이 '신비주의 전략'을 쓰는 탓에 자신들이 키우는 해외파를 극비로 삼기 때문이다. 연예계 관계자는 "큰 기획사의 경우 100명 가량 키우는 곳도 있는데, 가수나 연기자 등을 합쳐 전체 규모는 1,000~2,000명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중 보통 3~4년에서 길게는 7~8년의 연습생 시절을 버텨 한 해에 실제 데뷔하는 숫자는 수십명에 불과하고 스타로 떠오르는 이는 극소수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이들의 성공 여부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재능과 성실성, 인내에 따라 결정된다"며 "해외파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이유도 없지? 그렇다고 개인차를 무시한 채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태무 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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