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안방, 한가위의 풍요로움을 대변하듯 송편 전 과일 등 갖가지 음식들이 상다리가 휠 정도로 그득하다. 잘 차려진 상을 가운데 두고 무릎을 붙여 가며 바투 앉은, 보기만 해도 입 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행복한 자리. 덕담이 오가며 웃음이 넘쳐 날 그 자리에 비수 같은 말이 한마디 던져진다면 분위기는 식혜에 밥 알 가라앉듯 일순 침몰한다.
상을 차리는 데는 한 나절, 엎는 데는 순식간이다. 별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에 잔칫집 분위기가 상갓집 분위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명절 뒤끝이면'형제끼리 칼부림''돈 이야기에 부모 폭행' 등 사건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
당신이 기사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한 마디 말도 조심할 일이다. 경제난에 취업난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요즘, 갓 쪄낸 송편의 따스함과 달콤함으로 아픈 마음을 달래 줄'꼭 해야 할 말'과 싸움을 부르는'하지 말아야 할 말'을 소개한다.
■ 이런 말 절대 삼가세요
노처녀에게'넌 도대체 언제 시집 갈 거니', 재수생에게'모의고사 성적이 그게 뭐냐', 백수에게 '옆집 누구는 대기업에 취직했단다'는 말은 상처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격이다.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고난을 겪고 있는 당사자만큼 마음이 초조할 리 없다. 부모 입장에서 깊은 애정을 짧게 표현한다고 던진 한마디라도 말이다.
형제 간 대화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대화 전문가인 이정숙 에듀테이너그룹 대표는"형제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라이벌"이라며 "카인과 아벨처럼 살인까지도 부를 수 있어 말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돈을 잘 버는 동생이 '형 아직 거기 살아'라고 물었다고 치자. 다른 사람에게는 '혹시 이사 안 갔느냐'로 들리지만 형편이 좋지 않은 형에게는'여태 그런 곳에서 사느냐'로 들릴 수 있다. 이렇게 사이가 한 번 틀어지면 어떤 말을 해도 곧이 들리지 않기 십상이다.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 고부 갈등도 곪아 간다. 바쁜 직장 생활로 부엌일이 익숙지 않은 며느리에게 '돈 버느라고 집안일도 못하는구나'라는 시어머니의 말은 뼈아프다. 평소 잘 챙겨 주지 못한 아이에 대한 미안함까지 오버랩돼 분노가 증폭된다.
만약 시어머니가 시누이들과 웃는 얼굴로 이런 농담을 던지면 효과 만점. 대폭발을 보장할 수 있다. 보통 이런 분노는 성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부부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다.
문제는 애정은 뒤로 감춘 채 내용만 부각시키는 한국인 특유의 직설화법이다. 이 대표는 "자식이나 형제를 더 잘되게 하자는 욕심 때문에 눈에 띄는 단점만 부각시켜 말하는 게 가장 큰 잘못"이라며"마음 아픈 이야기를 가족에게 들으면 그 충격은 더 크다"고 말했다.
■ 민감하다고 말 안 하는 건 역효과
민감한 문제라고 해서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게 최선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못마땅한 부분을 대 놓고 말하는 직설화법이 최악이라면 말하지 않는 것은 차악이다. 노총각 노처녀에게 결혼, 수험생에게 점수 타박등이 민감한 문제라고 해서 입에 올리지 않으면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나이 마흔을 넘은 딸에게 결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딸은 '결혼하지 않아도 부모님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가 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수험생에게 점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이제 포기했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따라서 관심을 표명하면서 자신을 지지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게 대화의 포인트다. 외줄타기처럼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전에서 꼭 필요한 테크닉이다.
■ 그렇다면 대화는 이렇게
화법에 변화를 줘 보자. 이제까지 자신의 습관은 과감히 버리자. 대화 상대는 남도 아니고, 사랑하는 가족이 아닌가.
노처녀 노총각에게는'좋은 사람 있으면 나에게 제일 먼저 소개해 줘'라는 말이 정답이다. 걱정은 하고 있으되 재촉하지는 않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 게다가 결혼 상대자가 있어도 혹여 부모가 탐탁지 않게 여길까 두려워 선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더 없이 좋은 처방이다.
취업 재수생에게는'취직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좀더 기다리면 좋은 소식 있을 거야'라는 말이 좋다. 부모와 형제의 지지는 큰 힘이다. 청년 시절 방에 틀어박혀 7 년 간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했던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의 부모가'크게 성공하려고 지금 놀고 있는 것'이라며 변함 없이 지지한 예를 굳이 들지 않아도 말이다.
명절 연휴 부엌일을 도맡아 하는 며느리를 다독여 주는 것은 시어머니의 몫이다. 칭찬에 인색하지 말라는 얘기다. ' 나 젊을 때는 한 겨울에도 애 업고 강에 가서 빨래했다'는 케케묵은 하소연보다 '아이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니'가 좋다.
세상이 그만큼 많이 변한 것을 누굴 탓하겠는가. 며느리가 여럿이라면 역할 분담은 시어머니가 나서서 해 줘야 한다. 첫째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TV 보면서 희희낙락할 ?둘째 며느리만 일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둘째 며느리에게는 칭찬이라도 곱게 들리지 않을 게 불 보듯 뻔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화 상대방을 고려하는 마음이다. 함병주 고려대안암병원 정신과 교수는 "대화 상대방을 고려해 격려 칭찬 위로의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며"좌절한 사람에게는'꿈을 갖고 버티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가족의 말이 큰 위안을 줄수 있다"고 조언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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