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 장석남 시인의 말 아끼기,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장석남이 얼마나 비밀을 잘 다룰 줄 아는 시인인가, 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이때 비밀이란 다시 신형철의 글을 빌려 말하자면 '얼굴의 반만을 드러낸 여인처럼 절반만 말해진 비밀'이다.
장석남 시의 매력은 말을 아끼면서 말을 널널하게 열어두는 데 있다. 그는 말을 아끼는데 그의 적은 말들은 마치 우주의 비밀을 열 것처럼 진하고 깊이 울린다.
'국화꽃 그늘을 빌려' '젖은 눈으로' 살다가 간 가을. 그리고 '국화꽃 무늬로 언 살얼음'으로 들어서는 겨울.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삶은 얼마나 비밀스러우며 삶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생각하게 된다.
장석남 시인이 조심스럽게 전해주는 비밀은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처럼 애잔하고 소소하다. 그리고 '너나 나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이 우리들의 생이라고 말한다. 이 매력적인 삶에 대한 단상은 국화꽃 그늘에 숨어있는 아릿한 아름다움 속에 서있다. 그 서늘하고도 말할 수 없는 애잔함의 자리 속에.
허수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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