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경기 안산 반월공단 내 잉크탱크 연구소. 맹물 같은 액체가 가득 담겨 있는 유리병이 즐비하다. 정체가 궁금해 물었더니 '잉크' 란다. 그것도 전기가 흐르는. 무심결에 병을 들었더니 관계자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조심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1㎏ 한 병에 500만원"이라고 한다. 이들이 애지중지하는 액체는 '투명 전자잉크'. 세계에서 처음 은을 녹여 만들었다는 데 조현남(52) 연구소장은 "요술 액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마침 이날 중국으로 전자잉크로 만든 반사필름 35억 원어치 수출 물량을 선적했다.
잉크는 모두 색이 있다?
잉크 하면 다들 검정, 빨강, 파랑 같은 색을 지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전자 잉크는 색이 없다. 종이에 글자를 새기는 기존 잉크 대신 전자 잉크는 어디든, 심지어 전기가 통하는 곳도 가리지 않고 원하는 색, 글자, 그림을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다.
잉크에 대한 고정관념을 모두 깨버릴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은. 전자잉크는 전도성(전기를 전달하는 성질)이 뛰어나고, 연ㆍ전성(잘 휘거나 퍼지는 성질)이 좋고, 비교적 가벼운 은의 특성을 최대한 살렸다. 게다가 기존 구리를 입힌 후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는 '에칭 기법' 대신 필요한 부분에 전자잉크로 그리는 다양한 프린팅 방식을 쓴다. 때문에 기존 공정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어 제조 원가 절약도 가능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플라스틱 같은 딱딱한 회로도가 아닌 자유롭게 휘는 가벼운 회로도를 만들 수 있다. 휴대폰 등 전자 제품의 인쇄회로기판(PCB), 무선인식(RFID) 태그 안테나, LCD용 반사 필름은 물론 태양전지, 반도체, 디스플레이, 무선 통신기기 등에 적용이 가능하다. 조 소장은 "우리도 어디까지 쓰일 수 있을지 가늠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특히 5년 안에 40조원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쇄전자 시장을 주도할 기술로 평가 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2007년의 가장 뛰어난 기술에게 주는 '최우수 IR52 장영실상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올해 지식경제부 신기술(NET) 인증을 얻었다. 4월에는 유럽의 인쇄전자전문조사기구 IDTechEx가 주는 '인쇄전자 기술상'을 획득했다. 현재 국내 주요 전자 업체의 휴대폰에 쓰이고 있고 노르웨이 '씬 필름' 등 해외 유명 회사들과 전자 잉크의 상용화를 위해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최첨단 기술의 뿌리는 오래된 '잉크젯'
인쇄전자 시장의 새 길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는 전자잉크이지만 정작 기술의 뿌리는 지금껏 써 온 '잉크젯' 원리이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그 인쇄 기술을(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얻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실천한 셈.
정광춘(56) 대표는 "잉크테크 하면 재생 잉크나 만드는 2류 회사로 여기곤 했다"라며 "2003년 미래를 이끌기 위해서는 선도 기술이 필요하다 맘 먹었고,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잉크젯 기법을 써 보자는 생각했다"고 회고 했다.
무엇이든 처음이 늘 그렇듯 과정은 험난했다. 특히 전자잉크의 열 처리(전자잉크에서 은을 뺀 나머지 물질을 제거하는 것) 온도를 낮추는 게 가장 큰 숙제였다. 온도를 낮출수록 전자잉크를 적용할 수 있는 소재가 다양해지는데, 기존 기술로는 섭씨 150~200도 이상이 돼야 열 처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잉크테크는 섭씨 130도 이하에서도 열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정 대표를 포함한 20명의 연구진은 밤을 새우며 온도와 싸웠고, 2005년 온도를 낮출 수 있는 특수 물질을 개발해 냈다. 박정빈(37) 팀장은 "기존에 쓰던 물질보다 가격이 싸면서도 많은 종류에 적용이 가능해졌다"라며 "처음 설마 이게 가능하겠느냐고 의심했던 대기업, 전문 연구기관 사람들도 전자잉크로 전기를 통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잉크탱크는 2007년 경기 평택 송포공단에 전자잉크를 이용해 제품을 만드는 생산 설비까지 갖췄다. 이날 중국에 수출한 LCD용 반사 필름도 이 곳에서 만든 것. 정 대표는 "설비 역시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라며 "전자잉크뿐만 아니라 전자잉크를 활용한 제품, 생산 설비까지 한꺼번에 수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안산=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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