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1월말 임기가 끝나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의 연임여부는 두 세 달 전만해도 매우 불투명해 보였다. 불(금융위기)을 끈 공로는 인정되지만, 애초 화재를 막지 못한 과오 또한 컸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 사이에서도 평가는 팽팽히 엇갈리고 있었다.
논란에 쐐기를 박은 것은 백악관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버냉키 의장 재지명 입장을 지난달 25일 공식화했다.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게 시장에 번진 '버냉키 리스크'를 줄이는 길이란 판단에서였다. 어쨌든 '단임 하차'의 불명예를 뒤집어 쓸 뻔했던 버냉키 의장으로선, 가슴을 몇 번은 쓸어 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백악관 발표로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음은 인준청문회. 물론 Fed의장 건에 대한 초당적 협력 관행상 의회가 그를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인준은 인준이고 청문회는 청문회다. 상원은 벌써부터 고강도 심문을 벼르고 있다고 한다.
의회로선 당연한 태도다. 경제가 대재앙을 맞았는데, 월스트리트가 실상 카지노와 다를 바 없음이 드러났는데, 천문학적 국민세금이 들어갔는데, 통화ㆍ감독정책 최고책임자의 재지명을 어떻게 '덕담'으로만 마무리해준단 말인가. 그렇게 한다면 그건 국민 대표기구도 아니다.
중앙은행의 중요성은 우리도 다를 바 없다. 한국은행 총재가 얼마나 막중한 자리인지는 이번 금융위기를 통해 확인됐다. 미국처럼 '경제대통령'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경제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한은 총재에게 부여된 역할의 무게는 어떤 국무위원보다도 무겁다.
하지만 Fed의장과 달리, 한은 총재는 임명과정에서 자질을 따져볼 기회조차 없다. 인사청문회 대상이 아닌 탓이다. 그냥 대통령이 임명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누구든 대통령 낙점만 받으면 얼마든지 한은 총재로 무혈 입성할 수 있는 게 지금 구조다.
그렇지 않아도 현 청문회제도를 놓고 말이 많은데, 중앙은행 총재까지 그 자리에 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사실 한은 총재가 자녀 진학 때문에 주소를 옮겼는지, 논문을 중복게재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어떤 경제관을 갖고 있고 ▦어떤 재산을 갖고 있는지 만큼은 철저히 따져야 한다. 중앙은행이란 본래 인플레와 맞서는 곳인데 만약 한은 총재가 맹목적 성장철학을 갖고 있다면, 경제는 정말로 위험해질 수 있다. 만약 그가 많은 부동산을 보유해 '버블'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자산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면, 그래서 금리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은 총재의 경제관과 재산상황을 가볍게 봐선 안 되는 이유, 다른 국무위원들과 달리 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구나 한은 총재는 임기가 보장되기 때문에, 임명단계에서 철저히 가리지 못하면 나중에 바로 잡을 기회도 없다.
국회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국회법을 고쳐, 한은 총재를 인사청문회 대상에 넣어야 한다. 그래서 생각과 재산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통과한 인사가 내년 4월 새 한은 총재에 임명되도록 해야 한다. 국회가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나 다를 바 없다.
이성철 경제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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