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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13> 내 인생 새출발,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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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13> 내 인생 새출발, 한국은행

입력
2009.09.28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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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입행은 내 인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먼저 나를 가난에서 벗어 날수 있게 했다. 물론 한은에 들어가서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점심을 외상으로 먹기도 하고 양복은 15개월 월부로 해 입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은 그 때 누구나 당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요하였다.

그리고 한은 입행은 장래에 대한 방황과 불안에서 나를 안정성장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였다. 그 동안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와 현실 사이의 너무 큰 간극과 이로 인한 불확실성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했다.

그러나 한은 입행으로 이 직장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안정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과분하다고 여겨지는 이곳 저곳에서 나에게 혼사얘기가 오간 것도 한은 합격이 가져다 준 부산물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취업의 기쁨을 안고 나는 1961년 2월 말 서울대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55년부터 군대생활을 합해 만 6년간의 대학생활이 내게는 고난을 이기고 나름의 성취를 이끌어낸 하나의 파노라마 같은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대학을 다니는 것이 호강하면서 다니는 쪽 보다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더 값진 자각과 경험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고생을 감수하신 아버지 어머니와, 진학까지 포기하고 어려운 길을 걸어온 여동생의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행의 신입행원 대졸 25명 고졸 45명에 대한 임명장이 4월10일 전예용 총재로부터 수여 되었다. 그 뒤 89년에 내가 건설부 장관으로 부임하고 보니 전예용 총재가 전임 건설부 장관을 역임하셔서 그 분을 선배로서 몇 번 모신 일이 있다.

그런데 임명장을 받던 바로 그날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6년 동안 뇌일혈로 병석에 계셨지만 그래도 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셨는데 이제 막 고난의 터널을 벗어나려는 시점에서 아버지는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고락을 같이 하고 역경을 이겨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엮여 지나면서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마을 옆 선산에 장례를 모시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겨둔 채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조사부 기획조사과에 배치되었다. 당시 조사부는 금융 산업 물가 무역 등의 통계를 담당하는 네 개의 과가 있고, 이들 통계를 이용하여 분석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기획조사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상적으로 기획조사과에는 경상계의 성적 우수자들이 배속되었다. 현재 한은의 조사통계기능은 조사국과 통계국으로 나뉘어 있는데 말하자면 현재의 조사국은 그 때의 기획조사과가 확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정부 공직자들은 월급으로 생활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은에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한은의 조사역이 정부의 과장으로, 한은의 과장이 정부의 국장으로 한 단계씩 올려 이동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 무렵의 한은 조사부장은 신병현(경제부총리, 작고) 차장에는 김정렴(대통령 비서실장) 안종직(경제기획원 기획국장) 송정범(경제기획원 차관, 작고) 등이었는데, 그 후 정부로 옮겨 중책을 맡았다.

당시 기획조사과의 인적 구성은 화려했다. 과장은 배수곤(은행감독원장, 작고) 대리급 조사역에는 하영기(한은 총재) 곽상수(박정희 의장 고문), 그리고 행원으로는 정영모(주택은행장) 김재윤(신한은행장) 나웅배(경제부총리) 김재익(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작고) 신복영(서울은행장) 이창규(한은 감사)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여기서 선임자가 써놓은 원고를 청서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 통계를 분석하는 방법, 글을 쓰는 방법 등 하나하나 배웠다.

그 뒤 조사부의 대폭적인 조직개편으로 기획조사과가 없어지고 각 분야별로 통계작성과 조사 분석을 함께 하도록 과가 재편되었다. 나는 국민소득과 금융재정과 그리고 경제전반을 다루는 일반경제과 등을 돌면서 근무했는데, 특히 국민소득을 추계한 것과 일반경제과에서 연차보고서와 사분기 보고서 등 금융통화위원회 보고서를 집필하고 정책수립에 참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국민소득추계의 정확성을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1967년에는 장기영 경제부총리(한국일보 사주) 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국민소득을 추계할 때 지금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 당시는 가발이 수출 주종 품목의 하나여서 머리카락 수집상이 전국을 누볐고, 긴 머리를 팔면 상당한 렝?받던 시기였다.

문제는 가발생산 원료로 들어가는 사람의 머리털이 어느 산업에 속하는가 하는 것이다. 쌀 생산은 농업이고 소가죽 생산은 축산업인데 사람의 머리 털 생산은 어느 산업인가 하는 것인데 사람이 동물의 하나인 만큼 축산업에 넣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축산의 뜻에도 맞지 않고 아무리 경제문제라 하지만 사람을 개나 소와 같이 다룰 수는 없다고 해서 결국 어정쩡하게 기타산업이라는 항목에 포함시켰는데 명쾌한 답이 못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면서 국민소득론 시간에 이 문제를 제기한 일이 있는데 교수 학생간의 장시간 토론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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