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에 와서도 산보다
무밭에 서 있는 게 좋아
푸른 술 다 마시고도 흰 이빨 드러내지 않는
깊은 밤의 고요
그 목소리 없는 무청이 좋아
깨끗한 새벽
저 잎으로 문지르면
신음 소리 내며 흘러내릴 것 같은 속살
밤마다 잎에다 달빛이 일 저질러놓고 달아나도
그때마다 흙 속으로 하얗게 내려가는
무의 그 흰 몸이 좋아
땅 속에 백지 한 장 감추고 있는 그 심성도 좋아
달빛이 놓고 간 편지 한 장 들고
무작정 애를 배는 대책없는 미혼모같은
배 불러오는 무청의 둥근 배가 좋아
무밭을 걷는 게 좋아
내 정강이 툭툭 건드릴 때 좋아
뽑으면 쑤욱 뽑힐 것같은
철없는 그 사랑이 좋아
● 무밭에 서서 땅 속에서 튼실해가는 커가는 무를 생각하기. 무 한 개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얼마나 많은가. 무채, 무국, 무를 채썰어 밥을 지어도 좋고 절여서 김치를 만들어도 든든하다. 그러니 깊은 산에 들어선 무밭 가녁에 서서 무를 생각하는 일은 얼마나 마음 벅차오르는 일일까.
깊은 산에 무밭이 있으니 그 밭의 무는 시인이 표현한대로 저렇게 귀엽지 않을까. '깊은 밤의 고요'는 '푸른 술 다 마시고도 흰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 없는 무청'으로 깊은 산은 무밭을 감싸고 있는데 쑥쑥 자라나는 무의 흰 속살.
산밤이 깊어갈수록 무잎 안에 고여든 달빛은 짙어지고 무밭을 산책하는 한 인간의 마음은 갑자기 '철없는 그 사랑'에 취할 것처럼 자유롭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정말 깊은 산에 자리잡은 무밭을 거니는듯 즐거웠고 유쾌했으며 내 마음의 발은 가벼웠다. 아린 무의 속살을 베어문듯 저렇게 싱싱한 삶의 순간이 있다니.
허수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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