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제도를 통해 새로운 길을 가는 시작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현 정권 뿐만 아니라 현대사 60년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에 의한 서민금융을 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잔뜩 흥분해 말했다, 또 "따뜻한 나라,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 획기적인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며 대기업이 어려운 계층을 돕는 일에'기꺼이' 나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유례없는 실험에 우려 기대 공존
청와대가 '친서민 정책의 결정판'이라고 자찬한 미소(美小)금융재단 얘기다. 대기업의 기부금 1조원, 금융권의 휴면예금 7,000억원, 은행ㆍ증권사 기부금 3,000억원 등 2조원을 조성해 제도권 금융 소외층인 저신용ㆍ저소득층에게 생계비나 창업자금을 저금리로 빌려주는 마이크로 크레디트(무담보 소액신용대출) 사업 말이다. 일정대로라면 12월에 우선 3,000억원의 기금으로 재단이 출범하고 전국에 200~300개의 지점을 설치해 적게는 500만원, 많게는 1억원까지 빌려주는 사업을 시작한다. 수혜 규모는 향후 10년간 20만~25만 가구로 추정된다.
이 대통령 말처럼 규모와 방식에서 유례없는 메가 프로젝트이며 새로운 접근법이다. 의욕과 취지대로만 운영된다면 청계천 복원이나 4대강 사업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둘 것이다. 야당이 떨떠름하게 여기는 이유도 이해된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모델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이 사업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함께 담겨 있다. 동기가 선하다고 과정과 결과까지 선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선 운영주체는 민간이지만 기금 조성 등 사업의 핵심이 정부 주도형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적극 참여하겠다는 전경련의 말과 달리, 개별 기업들은 벌써부터 할당액이 얼마나 될지 눈치를 살피며 불만을 토해낸다. 준 조세로 기업에 부담을 지우고 생색은 정부가 낸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시대정신이 있으니 이런 항변은 모른 척 넘어갈 수 있겠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운영이다. 대표적 금융인이자 이 사업에 큰 관심을 보여온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재단이사장을 맡는다니 조직은 물론 대출과 회수의 전 과정을 엄격하고 치밀하게 관리할 것으로 믿고 싶지만 조 단위의 돈으로 전국 규모로 벌이는 사업에 누수와 도덕적 해이가 빠질 수 없다. 금융회사 퇴직자나 청년 자원봉사자 등으로 운영되는 심사 및 대출 창구가 '눈먼 돈'을 보고 달려들 정부나 정치권의 압력성 민원을 감당하리라는 것은 참으로 순진한 발상이다.
세계적으로 마이크로 크레디트가 소규모 지역에서 공동체적 성격으로 운영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학계가 정부 주도형 나눔운동의 한계를 꼬집으며 자발성과 감동을 근본으로 하는 '은혜와 보은의 경제원리'가 사업의 근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경청할 만하다.
재단이나 정부는 사업 시작 이전에 이런 우려를 해소할 여러 장치와 인프라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재단에 그런 능력이 있을 것 같지 않고 정부는 더더구나 미덥지 않다. 저소득층에 무담보 소액창업자금을 지원하는 희망키움뱅크 사업의 올해 수행기관으로 기존 사업체 대신 경험과 실적이 없는 뉴라이트 혹은 보수 계열의 공익법인을 선정하면서 전문인력 확보 등의 부대조건까지 친절히 달아준 정부이기에 말이다.
미소재단 출범으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처럼 말 그대로 NGO형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잘 수행해오던 신나는 조합이나 사회연대은행 등의 기능과 역할이 위축되는 것도 잘 따져봐야 한다. 행정력에 기반한 반관반민의 사업체가 민간 단체의 영역을 구축(驅逐)하면서 애써 쌓아온 공동체적 사업모델까지 뭉갤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박원순-국정원 쟁송 의구심 증폭
김 이사장과 정부는 이런 지적을 유념해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한층 치밀한 설계도를 내놓기 바란다. 하나 더 바란다면, 하나은행이 박원순 희망제작소 이사와 국가정보원간 '불편한 쟁송'의 원인을 제공한 만큼, 하나희망재단을 만들 때의 의기투합과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김 이사장은 박 이사의 섭섭함과 의문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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