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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지식인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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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지식인의 정체성

입력
2009.09.28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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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실낙원> 을 쓴 청교도 시인 정도로만 알려진 밀턴은, 시인이기에 앞서 당대 일급의 논객이자 석학이었다. 어학에도 조예가 깊어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비롯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고전어는 물론이고 유럽 각국의 현대어에도 두루 능통했다.

시류 떠나 영어로 글 쓴 존 밀턴

특히 당시 국제어로 통용되었던 라틴어 실력은 프랑스·이탈리아 등 대륙의 지식인들도 극찬할 정도였다. 밀턴이 크롬웰 정부에서 외교부장관에 발탁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얼른 납득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17~18세기 영국은 유럽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던 변두리 섬나라였다. 영국인은 특히 이탈리아에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문명의 발상지였을 뿐더러 15세기에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를 피워 낸 유럽의 '선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영국은 유럽의 서북쪽 끝에 붙어 있는 낙후한 변두리 국가에 불과했다.

그러니 행세깨나 한다는 영국인 가운데 이탈리아에서 2∼3년간 체류한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은 시골뜨기 취급을 면할 수 없었다. 18세기 영국 문인 새뮈얼 존슨은 "이탈리아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항상 열등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였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러시아의 귀족들도 재빨리 그런 유행을 뒤따랐다.

18세기 유럽의 이 같은 이탈리아 여행 붐을 '그랜드 투어'라고 하는데, 그것은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사실상의 해외유학이었다. 성공한 금융업자의 아들인 밀턴은 31세 되던 해에 1년 3개월 동안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아직 그랜드 투어가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자택에 연금되어 있던 천문학자 갈릴레이를 만나 교분을 쌓은 것도 이 여행에서였다.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밀턴은 이렇게 다짐했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내 조국을 명예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라틴어로 글을 쓰면 해외에서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하여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사용하겠다."

두 번째 문장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밀턴은 국제적 명성을 얻기 위해 영어보다 라틴어로 저술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변방 언어인 영어로 작품을 쓰면 읽을 사람이 몇 안 되지만 라틴어로 쓰면 전 유럽의 지식인을 독자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턴은 이 모든 가능성을 접고 모국어로 작품을 쓰겠노라 결심했고, 그의 야심은 훗날 <실낙원>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영어가 세계어로 자리잡게 되기까지는 이 같은 수많은 숨은 노력이 있었다.

작년에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지식 사회 일각에서는 한국 현실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를 국내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탄식이 나왔다. 연구 업적 평가의 기준이 미국의 저명 학술지에 실린 논문 횟수이기 때문이다. 국내 학술지보다 미국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3~5배 높은 점수를 받는데, 미국 경제학회지에 논문이 실리려면 미국 경제학계의 이슈를 따라가야 한다. 굳이 한국 현실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 영혼은 미국 하늘을 떠돌면서 육신의 빈 껍데기만 이 땅에 머물고 있는 황폐한 풍경이다. 이런 현상이 경제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도 이젠 '우리의 꽃' 피워야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근대화'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정체성'은 우선순위에서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근대화를 통해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성취를 이룬 시점이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한국'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돌아볼 때가 되었다. 이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꽃'을 활짝 피워 낼 지식인도 있어야겠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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