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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 단종복위(端宗復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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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 단종복위(端宗復位)

입력
2009.09.28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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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단종 1년) 계유정란(癸酉靖難)이 일어났다. 노산군(魯山君)의 숙부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2년 뒤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노산군을 쫓아내 상왕으로 모셨다가 죽이고,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었다.

이 이후 조선의 왕통은 세조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사육신을 현창하자거나 노산군을 추복하자는 사람은 역적이었다. 예종 조에 간행된 <무정보감(武定寶鑑)> 에 이미 그렇게 규정하고 있었다.

반면에 사림들은 수양대군이 노산군을 몰아낸 것을 패륜으로 규정하고, 노산군의 복위와 사육신의 현창을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세조를 부정하는 행위였으므로 대단히 위험했다.

1576년(선조 9년) 박계현(朴啓賢)이 사육신 및 노산군의 추복을 요구하자 중종은 격노해 "지난날 우리 세조가 천명을 받아 중흥하신 것은 진실로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남효원은 어떤 자이길래 감히 문묵을 희롱해 국가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했단 말인가? …

저 육신이 충신인가? 충신이라면 어째서 수선(受禪)하는 날 쾌히 죽지 않았으며, 그렇지 않으면 또 어째서 신발을 신고 떠나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 먹지 않았단 말인가? …

그런데도 저 육신은 무릎을 꿇고 우리 조정을 섬기다가 필부의 꾀를 뽐내어 자객의 술책을 부림으로써 만의 하나 요행을 바랐고, 그 일이 실패한 뒤에는 의사(義士)로 자처했으니, 마음과 행동이 낭패한 것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열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다시 이를 거론하는 자는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2년 뒤에 사육신의 추복이 전격적으로 단행되고, 1694년(숙종 20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노산군을 추복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은 장희빈 소생 원자의 책봉을 반대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신료들에게 '군신의 분의(分義)'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숙종은 사육신과 노산군의 추복을 반대하다가 돌변해 이를 단행한 것이다. 어린 군주를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과 대비해 송시열 등의 행위를 '불충'으로 낙인찍고, 원자책봉을 강행하려는 것이었다.

노산군은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노산군을 추복하는 근거로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양(禪讓)했고, 세조가 노산군을 상왕으로 모신 것이지 쫓아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들고 있다. 그리고 단종을 죽인 것도 세조의 본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조가 사육신을 "당대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忠臣)"이라한 말도 원용되었다.

여하튼 세조의 집권과 왕권강화를 위해 취해졌던 노산군 축출과 사육신 처벌이 숙종의 왕권강화를 위해 단종복위와 사육신 현창으로 나타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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