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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국정원의 넛지

입력
2009.09.28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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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 교수가 쓴 <넛지> (nudge)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여름 휴가지에서 읽고 청와대 참모들에게도 선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책이다. 넛지는 사전적으로, 팔꿈치로 슬쩍 옆구리 찌르기라는 뜻인데, 탈러 교수는 이 책에서 '타인의 똑똑한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라고 새롭게 정의했다.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상임이사가 희망제작소 사업 방해 및 자신에 대한 사찰 의혹을 제기하고, 국정원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언뜻 이 책을 떠올렸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정원의 행동반경이 대폭 넓어졌고, 국내 정보분야 현장 요원들의 활동량이 부쩍 늘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박원순 소송'이 알려준 무리수

하지만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이전과 같이 노골적인 개입과 사찰이 있으랴 싶었다. 기껏해야 희망제작소 사업을 지원하는 기업이나 정부기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찌르는 행위가 부른 결과가 아니겠는가 싶었다.

그러나 박 이사가 국정원, 아니 국가로부터 2억원 상당의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뒤 며칠 뒤 기자회견과 함께 희망제작소 홈페이지에 올린 "국정원 사찰, 진실은 이렇습니다"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직ㆍ간접적으로 겪은 수많은 희망제작소 사업 방해 개입 및 사찰 사례들은 팔꿈치로 슬쩍 옆구리를 찌르는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부드러운 개입을 뜻하는 넛지와 한참 거리가 멀다. 태국의 무에타이와 같은 격투기에서는 팔꿈치가 주먹보다도 더 강한 타격 수단이다. 국정원이 거칠고 강한 팔꿈치를 이용해 박 이사가 주장하듯이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사찰과 감시, 개입을 조직적으로 일삼고 있다면 정말 심각한 사태다.

국정원 측은 증거가 있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명확한 물증이 있기 어렵다. 박 이사 개인의 주장이나 희망제작소 사업 파트너들 진술 등의 정황이 고작일 것이다. 국정원 요원들이 선진적인 정보수집 노하우를 배우는 데는 별로 열심인 것 같지는 않지만 물증을 질질 흘리고 다닐 정도는 아니다.

희망제작소와 사업을 같이했거나 하려다 갑자기 중단한 기업과 정부 관계자들이 국정원의 팔꿈치 찌르기가 언제 어떻게 얼마나 강하게 들어왔는지 상세하게 진술을 해준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웬만한 용기와 각오가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사정을 믿어서인지 국정원은 박 이사에 대해 국가의 이름으로 거액의 명예훼손 소송이라는 난폭한 하이킥을 날렸다. 물론 진보적인 시민단체에 우호적이었던 전 정부 시절 활동범위와 사업 영역을 크게 늘렸던 박 이사가 정권이 바뀐 뒤 환경이 달라지자 피해의식에 과잉반응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 증거의 뒷받침을 떠나 정권이 바뀐 뒤 박 이사와 희망제작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 정도면 관련 국가기관을 상대로 의혹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국정원이 명예훼손 소송으로 대응하는 것은 권력기관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보수적 가치 옹호에 앞장섰던 이석연 법제처장과 대한변협까지 나서 국가를 소송 주체로 내세운 것을 비판하거나 소송 철회 촉구성명을 괜히 냈겠는가.

최고 통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 모르게 단지 국정원 차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박 이사와 희망제작소의 탈 정치적 생활시민운동을 막는 것은 최근 이 대통령의 지지도를 높이고 있는 친서민정책 기조와 전혀 맞지 않는다.

직무 범위 넓히기 부작용 자초

그래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국정원 옛 버릇의 부활이거나, 공직사회와 일반사회 각 분야에서 진보정권 시절 빼앗겼던 영역 탈환에 여념이 없는 뉴라이트 세력의 팔꿈치가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하간 국내정치 분야에서 국정원의 전방위적인 개입 논란이 증폭되는 상황이라면 국정원법 개정을 통해 직무범위를 넓히겠다는 국정원의 숙원은 저 만큼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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