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호 지음/이가서 발행·612쪽·2만3,000원
"…생전에는 입 벌려 웃더니, 죽은 뒤에 누가 이 즐거움 아울러 지닐까. 다만 한스럽게는 세상 살았을 적, 끔찍하게 여섯 액운이 모였던 일. 용모가 추해서 여색을 가까이 못한 것, 집이 가난해서 술 충분히 못 마신 것, 행실이 더러워 미친놈 소리 들은 것, 허리 곧아서 높은 분을 화나게 한 것, 신이 뚫어져 뒤꿈치가 돌에 닿은 것, 집이 낮아 이마가 대들보에 부딪힌 것."(387쪽)
조선 전기 문인 남효은(1454~1492)이 쓴 자만(自挽·스스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다. 남효은의 삶은 의기 만만하고 분방했다. 스물다섯 되던 해, 소릉(단종 생모의 릉)을 복위시킬 것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세상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다. 꿈과 현실은 종내 어긋버긋했다. 그는 서른아홉에 세상을 버렸다.
긍정할 수 없었던 삶이 잦아드는 순간, 남효은은 꼿꼿이 죽음을 직시하며 자만을 지었다. "개미들은 내 입에 들어오고, 파리 모기는 내 살을 물어뜯으며, 새로 꼰 새끼는 내 허리를 조르고, 헤진 거적은 내 배를 덮었다… 이 때 내 마음이 어떠하랴, 일곱 구멍이 모두 막혔구나."
<내면기행> 은 남효은의 자만을 비롯해 선인들이 남긴 자지(自誌), 자명(自銘), 자표(自表), 만시(挽詩) 등의 글을 모은 책이다. 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죽은 뒤 자신의 묘비에 새기거나 함께 묻어 달라고 지은 글들이다. 멀게는 800여년 전, 가까이는 지난 세기 초 살다 간 선인들의 글을 골라 엮었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가 한글로 풀고 해설을 붙였다. 내면기행>
심 교수는 권두에 이렇게 썼다. "나의 가장 외부에 있으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완결시키는 것이 나의 죽음이다. 어쩌면 죽음 자체는 내 외부의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죽음 뒤에 나는 모욕도 칭송도 들을 길 없이 그저 흙으로 돌아가고 서서히 나의 존재는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의해 일단 완결된 내 존재의 의미를 내가 알 수 없을 것이기에 그 점이 두렵다."
우리 선조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종교적 관념이 박약했다. 살아서 자기의 묘표나 묘지를 쓰는 일은, 그래서 죽음이 가져올 존재의 무화(無化)를 극복하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에는 죽음을 징험(徵驗)한 자의 성찰과 달관, 회환이 배어있다. 더러는 일생의 추구한 바를 온축해 남기려는 에너지가 응결돼 있다. 그 마지막 목소리 앞에 송연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나의 어리석은 몸뚱이.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필경 어디로 가는 것일까… 딸 하나 아들 둘로,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아라. 복숭아와 배가 문에 가득하니, 이 또한 위로가 아니랴."(126쪽) 김훤(1258~1305)의 자찬묘지(自撰墓誌)는 자족한 선비의 여여(如如)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안일과 거리가 멀었다. 김훤은 원나라 침공기의 아수라장을 살았다. 번민의 생이 저무는 순간, 자족을 노래하는 선비의 경계가 아득하다.
임진왜란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정암(1541~1600)의 자만. "효행과 충성도 모두가 무능하여, 하늘의 재앙과 귀신의 앙화가 다투어 닥쳤거늘… 황천길에 무궁한 원한을 품으리니, 동해가 능곡으로 변함을 보지 못했기에."(29쪽) 그는 자신의 무공을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동해가 능곡(언덕과 골짜기)으로 변해 왜구가 없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한을 묘비에 새겼다. 역사는 이정암에 대해 "집에는 쌀 항아리가 비었고, 옷은 고작 한 벌뿐이었다"고 전한다.
저자는 "선인들이 죽음을 의식하면서 거기서부터 소생해왔던 삶의 태도야말로 이 시대의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라고 굳게 믿는다"고 썼다. 통절한 슬픔, 덧없음, 고독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절대성 앞에서 삶의 의미를 자문하게 만드는 책이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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