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자리나 순서를 가로채는 새치기를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로 꼽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지하철 역에서 두 줄 대신 네 줄 서기를 권장할 정도로 줄 잘 서는 국민이 됐다. 새치기 경쟁을 뚫고 택시 잘 잡는 남자가 1등 신랑감이라던 잠언은 추억 속의 우스개가 됐다. 그만큼 시민의식이 높아졌고 대중교통 등 모든 여건이 좋아졌다. 그러나 거리와 지하철 등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곳이 아닌 은밀한 공간에서도 그럴까. 어디서든 앞 뒤 가리지 않고 마구 끼어드는 운전자가 많은 걸 보면, 은밀하지 않더라도 직접 눈을 마주치거나 욕 먹지 않으면 머리를 들이미는 형태로 바뀐 듯도 하다.
■어쨌든 공공장소의 새치기가 줄어들 무렵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을 부쩍 자주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 상관관계를 깊이 논할 재주는 없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계층 구분이 뚜렷해지면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른바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엄격한 눈으로 보게 됐을 것이다. 기초질서 준수 등 일반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던 사회가 민주주의의 고유한 질서를 깨친 것으로 볼 만하다. 지도층 반열에 다가선 지식인들이 듣기 싫증날 정도로 유난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한 것도 기억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성경에도 나온다지만, 로마시대 귀족이 공공봉사와 기부ㆍ헌납에 솔선수범한 데서 비롯됐다. 특히 제국을 지키는 전쟁에 앞장서 많이 희생되는 바람에 원로원의 귀족 비율이 15분의 1까지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 전통은 서구 사회로 이어져 신분과 권력, 부와 명예에는 상응한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사회적 합의로 정착됐다. 이를테면 영국 귀족은 세습 신분을 사회가 인정한 대가로 전쟁에 앞장서고, 재산을 기부하고 더 이상 증식하지 않으며, 공직에는 오로지 봉사하기 위해 나간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흔히 부자들의 기부행위에 초점을 맞추지만, 공직후보 검증에서 병역과 납세의무 이행을 우리보다 더 엄하게 따진다. 그게 계층 갈등을 줄이는 최선의 길이라는 인식이 확고하다. 여기에 비춰 보면, 우리 총리와 장관등 공직 후보마다 병역과 납세 의무를 게을리한 것으로 드러나는 현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타령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새삼 보여준다. 특히 부동산 투기와 위장 전입은 고상한 도덕적 의무를 논할 수준도 못 된다. 선량한 국민은 법과 사회적 합의를 좇아 길게 줄 서는 데도 은밀하게 새치기한 것과 다름없다. 정책수행 능력이 우선이라는 주장은 '택시 잘 잡는 신랑감'우스개를 닮았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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