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은 올해 다문화 고등학교 2학년에 진급해 '엄마필' 학생을 집단 따돌림 시킨 적이 있지요?"(검사) "예." (피고인)
"엄마필 학생의 어머니가 필리핀인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괴롭혔을 뿐 아니라 이를 반 아이들에게 퍼뜨려 모욕을 준 사실이 있습니까?" "예."
"엄마필에게 육체적 상해를 입힌 사실도 인정합니까?" "제가 욕설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폭행하지는 않았습니다."
"폭행을 하진 않았지만 피고인이 조장한 집단 따돌림이 결국 폭행으로 이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아닙니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번질 줄은 몰랐어요. 평소 몇 마디 하는 장난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반 아이들이 모두 엄마필을 싫어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장난이더라도 그 언행이 상처가 될 줄은 조금도 몰랐나요?" "죄송합니다."
25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별관 4층에서는 다문화가정 학생 엄마필(17)을 집단 따돌림한 혐의로 기소된 고등학생 김승민(17)군에 대한 형사재판이 열렸다. 방청객은 숨을 죽인 채 재판정을 주시했다.
한 시간 반 가량 검사와 변호인의 심문이 이어진 뒤 재판부는 "신체적 폭행은 아니었지만 이보다 더한 정신적 충격을 준 점을 인정해 징역 3월에 사회봉사 20시간을 선고한다"고 유죄 판결했다.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이날 모의재판은 대안학교인 서울 강서구 성지중ㆍ고교 학생 16명이 참여해 만들었다. 재판장과 검사, 변호인, 피고인도 모두 학생들이 맡았다. 이 학교가 1997년부터 흡연, '왕따' 등 청소년 탈선의 문제점을 학생들 스스로 깨닫게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해온 행사다.
올해 아홉 번째를 맞은 모의재판의 주제는 다문화가정 학생이 크게 늘면서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들에 대한 왕따 문제.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다문화가정 자녀 수는 2005년 7,712명에서 지난해 2만171명으로 급증했다.
재판장을 맡은 김바오로(16)군은 "학교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돼 이에 대한 문제 제기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재판을 지켜본 학생들은 사뭇 진지했다. 유승원(18)군은 "중2 때 귀 한쪽이 없는 학생을 친구들과 함께 괴롭힌 적이 있다"며 "이번 재판을 보고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예찬(18)군의 어머니는 "백 마디 설교보다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와 닿는 것 같다"고 했다.
일반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혔던 학생들이 많은 대안학교다 보니 학생들에게 모의재판은 더욱 남다른 의미가 있다. 모의재판에 참여한 몇몇 학생은 폭행 등으로 실제 재판을 받은 경험이 있다.
폭행, 절도 등으로 보호관찰 처분까지 받았던 성모(16)양은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싸우고 그랬는데, 실제 재판을 받으면서 내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모의재판 연출을 담당한 박진철 교사는 "전교생 1,800여명 중 20% 이상이 과거 범죄를 저질러 전과가 있거나 보호관찰을 받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별다른 죄의식 없이 장난처럼 범죄를 저질렀다가 막상 처벌을 받고 나서 깊이 후회를 한다"며 "모의재판을 통해서 학생들이 왕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