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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14> 민주화의 토대를 구축한 1971년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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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14> 민주화의 토대를 구축한 1971년 투쟁

입력
2009.09.28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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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ㆍ16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64년의 한일회담 반대투쟁, 68년의 부정선거 규탄투쟁, 69년의 삼선개헌 반대투쟁, 70년의 전태일 투쟁 등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을 반대한 가장 치열한 투쟁은 71년에 전개되었고, 이 때 형성된 민주세력이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에 이르는 동안 반독재민주화투쟁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집권한 역대 '민주정부'의 중심세력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71년의 민주화투쟁은 여러 측면에서 민주화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71년에는 3월 개학과 더불어 곧바로 투쟁이 시작되었다. 서울법대의 경우 3월5일 '자유의 종'을 통해 '학생군사훈련의 문제점'을 제기해서 분위기를 띄운 다음 곧바로 교련반대 성토대회와 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3월9일에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교련철폐투쟁선언'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서울대학 전체가 교련반대투쟁에 돌입했음을 의미했다. 이 '교련철폐투쟁선언'은 조영래가 작성했는데, 교련반대운동의 지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71년 그 중요한 시기에 서울대학의 학생운동은 대단히 쉽게 진행되었다.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세력인 문리대, 법대, 상대 학생회장들의 투쟁의지와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문리대의 이호웅과 상대의 김상곤은 교양과정부에서 심재권이 회장으로 있던 후진국사회연구회 회원들이어서 심재권과 가까웠고, 법대의 최회원은 농촌법학회 회원이어서 나와 가까웠다.

사실 가깝다 멀다 할 것이 없이 우리는 완전히 의기가 투합해서 각종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법대 학생회장인 최회원은 서울대 총학생회장까지 맡고 있어 나로서는 한결 더 편했다. 최회원의 헌신적 투쟁은 서울법대를 학기초부터 투쟁열기로 가득 차게 했는데, 그것은 뒤에서 기술코자 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심재권에 대해 몇 마디 언급했으면 싶다. 심재권은 71년 운동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의 운동에서도 나와 함께 활동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69년도에 즉 서울대학에 교양과정부가 새로 생기던 해에 서울상대 무역학과에 입학해 교양과정부에서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를 조직해 그 회장을 지낸 사람으로 71년 학생운동을 주도한 사람이다. 후사연 회원들이 그의 굳건한 기반이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데모를 막아볼 요량으로 서울대학에 교양과정부를 신설해서 1학년생들을 태릉 공대캠퍼스로 몰아넣었으나 심재권 때문에 그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다. 1학년생을 다 모아 둔 교양과정부에서 그는 학과 구분 없이 '후사연' 회원을 확보해 학생운동가를 대거 배출한 데다, 단과대로 분리되어 있던 서울대에서 대학간의 연대가 쉽게 이루어지게 했으니 말이다.

심재권은 외모부터가 혁명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무엇보다 그는 키가 아주 작았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흠이 아니라 그의 투지를 돋보이게 했다. 특히 그의 동그란 눈은 그의 총명함과 지략과 투지와 담대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71년 늦여름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을 친견한 일이 있는데, 성철 스님의 동그란 눈을 보면서 '심재권의 눈이 성철 스님의 눈을 꼭 닮았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의 큰형 심재택은 4ㆍ19 주도세력이었고, 그의 동생 심재식은 서울의대 학생운동의 창시자로 평가받을 정도니 그의 투지와 역량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얼핏 보면 투쟁밖에 모를 투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지내보면 너무도 따뜻하고 인정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의 성품에서 빼서는 안 될 게 또 있는데, 그는 여릴 정도로 순진했다.

나는 그와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고, 무슨 일이든지 의논해서 함께 했다. 그와 의논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개인적으로도 행운이지만 운동적으로도 행운이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과 40년 넘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으니, 그의 인물됨을 알 수 있다. 그는 지금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데 그의 진가가 발휘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오래 전부터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진보적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말은 사실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혁명적이 된다'는 말을 순화해서 표현한 것으로, 심재권이나 조영래, 전태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느낀 결론이었다.

그런데 내가 몸담고 있는 서울법대가 중요한데, 서울법대는 학생운동역량이 넘쳐났다. 학생운동의 중심이 서울문리대에서 서울법대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게 없다. 무엇보다 탁월한 학생운동가가 많았는데, 이들과 途?한 일들을 다 적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우선 이름만이라도 생각나는 대로 밝혀 두고 싶다.

이신범 조희부 이광택 권용구 박준호 백문규 정재길 이인제 채만수 최규성 원정연 이상덕 박원표 최회원 김경남 장성규 최태식 박원철 최명의 정계성 최혁배 양재호 우양구 정찬혹 유제인 등인데, 71년도에 재학 중이었던 학생들이다.

특히 1학년생으로 교양과정부에 다니면서도 '자유의 종'과 각종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선배들이 하는 일을 열심히 도운 배기운은 더욱더 잊히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사법시험을 단념한 채 민주화투쟁에 전념하다 졸업 후 사회 각 부문으로 진출했는데, 다들 초심을 잃지 않고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젊을 때 정의감과 역사의식이 강해야 어른이 되어서도 큰일을 하게 되는구나 싶은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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