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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세뇌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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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세뇌되셨네요

입력
2009.09.25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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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1972년은 어리둥절한 사건이 많은 해였다. 반공결의대회에서 피를 내어 섬뜩한 구호를 써 보이는 일이 다반사였고 학교에는 무장공비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어린 이승복의 동상이 세워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투철한 반공투사로 키워졌고, 반공포스터 대회에 제출되는 그림에서 공산당은 대개 머리에 뿔이 난 괴물로 묘사되곤 했다.

민주주의 후퇴 우려 커져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7.4 남북공동선언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이 표방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은 우리가 배운 반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뿔이 난 괴물로 여기던 공산당의 고급 관료가 우리 측 대표와 손을 잡고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회 과목에서 헌법을 배우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확인했고 그렇게 시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해 가을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었으며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탈법적 조치가 현직 대통령에 의해 취해진 것이다. 국회의원의 3분의1과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필요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헌법이 대의기관도 아닌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국민 앞에 선서한 대통령이 그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을 그것도 '구국의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상식에도 맞지 않았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바로 그 시기에 민주주의를 배우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까지 배웠던 민주주의와 헌법에 관한 기억을 깨끗이 지우고 유신헌법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새로 써나가야 했다. 나는 지금도 유신헌법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힘들어하시던 사회 선생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유신헌법의 전도사가 되었던 교장선생님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산 교훈을 얻었다. 반공도 민주주의도 필요하다면 버릴 수 있어야 했다. 이제는 박정희라는 개인이 진리였고 그 진리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대학에는 전투경찰이 상주했고 누구든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사복경찰에 끌려갔다.

문민정부 이후 이러한 권력기관의 횡포는 거의 사라졌다. 적어도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 빈말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제 우리는 명실상부한 민주시민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도 있었다. 외환위기가 있었고 크고 작은 선거에서 편을 갈라 치열하게 싸우기도 했으며 지역, 빈부, 좌우의 대립도 있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를 되돌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상식 무너뜨리는 정치권력

그런데 21세기가 시작된 지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광우병의 위험성을 폭로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PD가 긴급 체포되고, 경제상황을 분석하는 글을 올린 네티즌이 구속되며, 국정원의 사찰의혹을 제기한 시민운동가가 국가로부터 거액의 소송을 당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국민에게 '세뇌되셨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문화정책을 책임지는 나라다.

하지만 정작 국민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은 무리한 법 집행으로 그 동안 어렵게 쌓아온 건전한 민주주의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정치권력이다. 그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다. 지난 해 그들이 들었던 촛불은 바로 그 상식에 대한 갈구이지 않았을까. 내가 37년 전에 겪었던 상식과 현실의 혼란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았으면 한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 · 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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