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경기로 최윤정과 최윤희를 맞붙여라."
1982년 9월, 뉴델리아시안게임을 눈앞에 두고 현 이명박 대통령(당시 수영연맹회장)이 수영국가대표팀 코치진에게 내린 지시 사항이다.
'인어 공주 자매' 최윤정(43)과 최윤희(42)의 본격적인 라이벌 관계의 시발점이다. '최윤희의 언니'로 잘 알려진 최윤정씨를 지난 22일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만났다. 예전의 온화한 미소와 복스러운 얼굴은 그대로였다. 삶의 여유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선수시절 동생과의 라이벌 관계를 이야기 할 때는 눈시울을 붉힐 정도였다. 그는 "동생한테 지면서 불가능과 좌절감을 처음 느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현실이었고, 지금은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윤정 동생 윤희'에서 '윤희 언니 윤정'으로
1980년대 '아시아의 인어'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영선수 최윤희의 언니 최윤정을 기억하시나요. 보통사람들이 아는 그는 비운의 스타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수영 종목에서 은메달 3개를 땄다. 당시 동생인 최윤희는 세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땄다. 동생에게 금메달을 뺏긴 그는 충격으로 은퇴했다. 지금도 물이 무서운 이유다.
최윤정은 '수영 신동'이었다. YMCA유치원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수영을 한 그는 서울 은석 초등학교 1학년 때 수영 선수 1명이 부족해 릴레이 대표로 대리 출전하면서 수영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5학년 때는 수영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는 최연소(12세)로 출전해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당시 동생 최윤희는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에 난 언니의 기사를 보고 "언니 또 나왔네"라며 신문을 구겨 옆집으로 던져 버릴 정도였다. 그만큼 최윤정은 잘나갔다. 집에서도 최윤정은 공주였고 최윤희는 찬밥 신세였다. 이 때문에 최윤희는 "다음에 내가 결혼하면 아들 2명을 낳아 큰 아이한테는 내복만 입히고, 둘째는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했을 정도다.
둘의 라이벌 숙명은 뉴델리아시안게임을 앞둔 9월부터 시작됐다. 둘은 연년생이어서 맞대결을 펼칠 기회가 없었지만 당시 수영연맹회장이던 이명박 현 대통령이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수영국가대표 코치진을 불러 "요즘 최윤희 기록이 왜 이렇게 나쁘냐. 최윤정과 맞대결을 시켜봐라"고 지시했다. 처음으로 붙는 자매 대결이었다. 종목은 배영 200m. 최윤정의 주종목이었고 주위에서는 두 선수에게 내기를 걸 정도로 흥행 거리였다.
자매 관계를 떠나 둘은 눈빛이 달라졌다. 경기장에서 50m 턴 할 때마다 둘은 눈을 마주치며 경쟁했다. 최윤정은 마지막 터치라인 앞에서 이긴 줄 알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최윤희는 끝까지 손을 내밀어 터치패드했다. 결과는 최윤희의 승리였다. "그때부터 동생이 무서워졌다"고 최윤정은 고백했다. 처음으로 동생을 라이벌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12월 열린 뉴델리아시안게임. 라이벌 동생이 '원수'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같은 종목에 나란히 출전한 최윤정과 최윤희. 첫 경기인 배영 200m 결선에서 동생 최윤희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윤정은 은메달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시상대에 올랐지만 그는 남 모르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차라리 다른 나라 선수가 1등을 하지 왜 하필이면 동생이냐"며 적개심을 불태웠다. 나머지 2개 종목에서도 금메달은 동생 차지였다. 그는 2인자였다. 같은 방을 썼지만 그날 밤 서로 축하해 주기보다 분위기는 오히려 냉랭했다. '적과의 동침'이나 다름없었다.
최윤정은 "동생이 정말 미웠어요. 좌절이라는 것과 인생의 쓴맛을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아시안게임 직후 수영계를 떠났다. 최윤정이 말하는 '인생의 1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라이벌 아닌 동반자로 새로운 도전할 터
"수영 선수 시절에는 코치님이 무서웠는데 지금은 남편이 무서운 코치다"라고 했다. 스포츠 마니아인 남편 오정수(건화치과 원장) 씨가 '아름다운 도전'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남편의 권유로 그는 2007년에는 춘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6시간 11분)하기도 했다. 대회 2개월 전에는 임신 한 줄도 모르고 달리기를 하다 유산하는 아픔도 겪었다.
그의 새로운 도전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다. 현역 시절 라이벌이자 사랑스러운 동생 최윤희와 함께다. 2000년 최윤희와 계획했던 남북 종단 수영도 여건이 되면 재개할 계획이다. 이는 동생의 염원이기도하다. 원산에서 속초까지 구간으로 당시 통일부 승인까지 받았지만 북측의 승인이 나지 않아 보류 중이다. 그리고 3년 내에 도버해협을 횡단하고 이어 맨해튼 아일랜드 순환 수영대회에도 나갈 예정이다.
남편인 오정수 씨는 "타고난 끼로 아름다운 도전을 통해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는 게 선수들의 몫이 아닌가요"라며 최윤정을 다독였다.
정동철 기자 ba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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