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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표준어'로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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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표준어'로 말하기

입력
2009.09.23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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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존을 위해 자발적인 활동을 하는 젊은 선생님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하던 일의 마무리를 하는 마디에서 이른바 '좋은 말'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간 자리였는데 실은 가기를 무척 망설였었습니다.

버나드 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는 사람은 하지 가르치지 않는다'. 흔히 듣는 말이지만 그는 식자(識者)들에 대한 거의 독기 어린 냉소를 품고 그런 말을 '내뱉었던'것 같습니다. 꼭 그 말을 기억해서는 아닙니다만 머리와 입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손발을 움직이며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게 마련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는 분들 앞에 서면 자신이 하는 발언이 위선이라는 자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에 대한 존경과 자신의 부끄러운 몰골이 겹치면서 그 모임에 가서 겪을 불편함이 미리 짐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친구의 강권으로 참석을 하긴 했습니다만 내킨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기우였습니다. 그들은 친절했고, 따듯했습니다. 저는 잔뜩 움츠리고 갔지만 그 분들은 저를 격의 없이 반겼습니다. 그런데 저를 당혹스럽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언어와 어투였습니다. 자연스럽다고 해야 옳겠습니다만 모임자리가 다르면 어휘가 낯설어집니다. 분명히 외국어는 아닙니다. 단어를 외어야 하고, 문법을 배워야 하는 그런 언어는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언어가 투명하게 전해지지 않고 어색합니다. 낯선 '사투리'같았습니다.

사람들 모임은 동질성의 밀도가 높을수록 언어가 독특해집니다. 자기네들에게만 익숙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언어와 다른 그 언어의 이질성은 그 모임을 더 정겹고 탄탄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 집단은 배타적이게 되기도 하고,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이게 되기도 하고, 이질집단 간의 소외, 갈등, 충돌을 낳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세대, 지역, 계층, 이념, 정치적 견해, 그리고 두드러지게는 종교 간에서 이 '사투리'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사투리가 빚는 혼란은 같은 용어인데도 다르게 사용하는 데서 더 심해집니다.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어가 차지하는 맥락이 다를 때, 그리고 그 맥락이 그 모임이나 집단의 존재자체를 기술하는 것일 때, 그 용어는 또 다른 맥락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의미의 실체로 기능한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용어의 원래 의미는 공유하면서도 서로 양보할 수 없는 현실적인 다른 의미 때문에 결국 소통의 부재를 실감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에 더해 발언의 억양이나 소리의 색깔까지 유념하면 동일한 언어가 얼마나 '다르게'발언되고, 그래서 '다른 현실'을 빚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통부재의 정황과 부닥칠 때 우리가 서둘러야 할 것은 주장의 거대담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언어를 소박하게 현실적인 차원에서 직면해야 하는 일입니다. 곧 상대방의 언어가 실은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는 언어인데 낯설게 된, 그래서 조심스럽게 경청해야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는'사투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사투리를 알아듣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 주장도 그러리라는 사실을 승인하고 내 발언을 사투리이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표준어'를 요청하는 것은 흔히 일컫듯 지배를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비록 인위적인 언어 짓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소통을 위해 불가피한 것임을 우리가 소홀이 할 수 없습니다.

그 모임에서 들은 낯선 용어 중의 하나는 '계실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투리는 아닙니다. '계획·실천·평가'를 줄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척 생소했습니다. 게다가 그 분들이 대체로 '교사평가'를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계실평'이라는 준거를 가지고 이제까지 해오던 일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더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은 계획했던 일을 다시 펼쳐 놓고, 그것이 얼마나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꼼꼼히 따지고, 그 결과를 실천과 계획을 거슬러 오르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평가하여 다음 경우를 대비하는지 제게는 그대로 감격이었습니다. '평가'는 그 분들의 일에서 핵심적인 추동력이었습니다.

이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릇 '평가'는 당위라는 것,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 나도 남을 평가하고 남도 나를 평가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평가하지 않으면 내가 나일 수 없다는 것. 그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살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 '평가'가 얼마나 소통부재의 언어로 서로 발언되면서 강요와 저항의 원색적인 상황을 빚고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서로의 '평가'주장이 외국어이기를 넘어 마치 외계인의 언어라고 전제해야 할 만큼 이질적인 것이 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평가'가 현실적인 차원에서 조금만 귀 기울이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투리'라는 사실을 서로 간과하고 있다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평가'를 표준어로 발언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그 소통부재의 공간을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아래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고등학교 교사를 평가한 고과표가 있었습니다. 이름, 담당과목, 소속 학교를 기재한 그 평가서에는 몇 가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항목에 따라 간단한 문장으로 평가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에 이 교사의 재임용 여부를 제언하는 난이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몇 가지 평가항목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장: 옷에 관심 없음, 별로 갈아입지도 않아 더럽고 남루함. 언어: 발음이 분명하지 않고 소리가 작아 어휘를 잘 알아들을 수 없음. 수업준비: 교재도 교안도 없이 빈손으로 교실에 들어옴. 교육내용: 전혀 목표가 없고 중언부언 횡설수설함. 학생반응: 극도로 혼란스러움. 종합평가: 자칫 학생들을 이상한 아이들로 만들 위험이 있음. 건의: 절대로 재임용해서는 안 됨. 그런데 이 평가를 받은 교사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습니다.

표준어로 '평가'를 말하면 소크라테스도 평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표준어로 '평가'를 말하면 평가 받은 소크라테스는 쫓겨나기 마련입니다. 표준어가 빚는 이 역설적 긴장이 사투리에는 없습니다. 소크라테스이기 때문에 평가를 안 받겠다든지, 평가를 해서 결과가 나쁘면 소크라테스라도 내쫓겠다든지 하는 발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표준어가 만드는 긴장이 이른바 새 현실을 빚는 바탕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평가'를 '표준어의 자리'에 되놓고, 서로 사투리를 이해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지요.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언론에서도 사투리 말고 표준어로 말하기를 의도할 수는 없겠는지요.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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