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기반이 되는 사회간접자본(SOC). 금융에도 SOC가 있다. 바로 '신용인프라'다. 믿고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정확하게 구분해내는 신용인프라야 말로 건강한 금융시스템을 위한 출발점이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우려했던 가계도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그 덕분이었다는 평가다. 우리나라 신용인프라의 현주소는 어디이고, 더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3회에 걸쳐 짚어본다.
5년 전 카드대란 당시 몇 개의 신용카드로 대출금을 돌려 막다가 금융채무불이행자에 빠졌던 회사원 차모(43)씨. 아찔했던 경험은 그를 신용관리의 '달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요즘도 매 5일마다 통장 잔고와 카드 사용액을 점검한다. 월급의 절반을 넘는 카드 사용은 금물. 전에는 호기심에 했던 대출한도 조회도 이제는 인터넷과 관련 기사를 충분히 살핀 뒤, 대출을 받아야 할 때만 하게 됐다.
이 같은 차씨의 습관은 호들갑이 아니다. 실제 차씨가 쓴 카드사용액과 대출조회 기록은 실시간으로 개인신용정보사(CB)에 전달돼 차씨의 신용등급에 반영된다. 현재 싫든 좋든 차씨처럼 CB로부터 신용등급을 관리받는 개인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90%를 넘는다. 오늘 연체가 생기면 이 정보는 밤사이 CB에서 가공돼 다음날 아침 9시 이전, 전국의 모든 금융기관에 퍼진다. 최장 30일이 걸리는 미국과는 천지차이. 앞선 IT환경과 과거 위기의 학습효과가 만들어 낸 대한민국 '신용 인프라'의 현주소다.
금융위기 1년을 맞아 CB의 역할이 재조명받고 있다. CB란 은행, 카드, 보험 등 각 금융사로부터 개인의 신용관련 정보를 수집, 가공해 이를 다시 개인과 금융사에 제공하는 회사. CB의 체계화된 정보와 금융사들의 강화된 리스크관리 시스템이 조화를 이뤄 지난 1년간 글로벌 금융위기가 최악의 부실 도미노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제 지난해 높은 가계부채와 경기침체에 따른 연체율 급등은 국가적 우려 대상이었으나 올 6월말 현재 국내 은행ㆍ카드사들의 연체율은 각각 0.59%와 3.10%로 오히려 금융위기 전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진작부터 돈을 갚을만한 사람에게만 빌려줬기 때문. 우리 사회의 신용 인프라가 금융위기라는 메가톤급 재난을 훌륭히 이겨낸 셈이다.
금융사들이 이런 신용 인프라에 눈뜨기까지는 외환위기와 카드대란이라는 두 차례의 학습효과가 크게 작용했다. 외환위기 당시 대량실직ㆍ부도의 충격을 실감한 국내 금융사들은 은행권을 필두로 저마다 자체 리스크관리 시스템 구축을 서둘렀다. 이전과 달리 대출자의 소득과 거래ㆍ연체기록을 꼼꼼히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대출자 스스로 작성해 오는 서류와 자사 시스템에 저장된 제한적인 정보로는 특히 새로 거래를 신청하는 신규 고객의 신용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는 결국, 2003년 카드대란으로 이어졌다. 몸집 불리기 경쟁 속에 신용을 제대로 따지지 않은 이른바 '길거리 카드발급'은 금융채무불이행자를 대거 양산했다. 그해 말 6개 전업계 카드사의 연체율은 28.28%까지 치솟았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CB들이다. 이들이 체계화된 신용정보를 회원사에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대출금액과 연체 규모, 기간에 따라 개인마다 신용등급이 매겨졌다. 금융사들이 더욱 세분화된 정보를 대출심사에 활용하면서 연체율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국민은행 개인여신심사부 이상래 팀장은 "CB 정보를 사용하면서 무엇보다 위험 관리의 자신감이 높아졌다"며 "경기 충격과 상관없이 연체율을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잡아둘 수 있게 됐고 전반적인 대출금리 수준도 예전보다 많이 낮아진 게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 김용덕 KCB 사장
"환란이나 카드사태 당시와 달리 국내 금융회사들이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데는 CB가 한몫을 했다고 봅니다."
김용덕(사진) 코리아크레딧뷰로(KCB) 사장은 22일 본보와 인터뷰에서 개인신용정보사(CB: Credit Bureau)들이 국내 금융회사들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고 자부했다. 특히 2005년 2월 국내 최초로 우ㆍ불량 신용 정보를 동시에 수집해 제공하는 KCB가 출범하면서 이번 위기 극복의 보이지 않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는 설명이다.
-아직도 CB는 일반인들에게 낯선 회사다. KCB가 하는 일을 설명하면.
"은행 카드사 캐피탈 저축은행 등 금융회사로부터 신용거래 정보를 수집해 평가, 가공한 후 대출 심사 등을 위해 필요로 하는 금융기관에 다시 제공한다. 금융회사가 합리적 금융거래 비용을 산출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신용도 하락 등에 따른 채무불이행 위험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도록 조기경보 시스템도 운영 중이다."
-다른 CB와 달리 '우량(positive) 정보'도 수집하고 있는데 이유와 장점은.
"다른 CB들은 은행연합회를 통해 연체, 대출 등 주로 부정적인 정보를 제공 받지만 KCB는 금융회사로부터 ▦카드 사용 실적 ▦대출 상환 ▦장기간 신용거래 등 긍정적인 정보도 제공 받는다. 금융회사들이 단순히 신용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신용 상태를 입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금융기관들이 안정적인 신용평가 시스템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일반인들에게 신용관리에 대해 조언할 부분이 있다면.
"은행들은 주로 ▦안정된 직장 ▦연봉 ▦근무연수 ▦재산세 납부액 등을 기준으로 개인 신용을 평가해 왔다. CB가 평가해 매기는 신용등급에는 이 같은 기준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주거래 금융기관에 꾸준한 실적을 쌓는 것이 좋다."
-CB 업계의 가장 큰 과제는.
"신용관리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높이는 것이다. KCB도 저신용자들의 신용관리를 돕기 위해 신용회복기금의 새희망네트워크에서 본인의 신용정보를 무료로 확인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신용회복위원회 프로그램에 컨설팅도 하고 있다."
글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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