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서울 마포구 마포노인종합복지관 앞. 벤치에 앉아 한가롭게 장기를 두는 노인들 앞으로 길이 7.5m의 흰색 캐딜락 리무진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난데없는 리무진의 등장에 노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지관 앞 길가에 선 리무진은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가을 나들이를 나설 7명의 어르신을 기다렸다.
복지관 문을 나서는 이종만(72)씨가 제일 먼저 리무진을 발견하고 "아이고 생각도 못했는데 고맙습니다. 참말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나들이 간다며 지팡이와 가방을 꽃무늬로 맞춘 김정인(87ㆍ여)씨도 활짝 웃으며 느린 걸음을 재촉했다.
할아버지 5명이 신사도를 발휘해 리무진 문 쪽에 세로로 길게 난 좌석에 앉고, 상석인 뒷좌석은
할머니 2명에게 내주었다. 나이가 제일 많은 조나열(94ㆍ여)씨는 반짝이는 네온 등과 핑크색 미니바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조씨는 "기단(긴) 차가 온다니까 그냥 오는가 보다 했지. 이렇게 반짝반짝 이쁠 줄은 몰랐네. 아유 곱다"며 새색시처럼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이날 치매 등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는 7명의 노인들은 난생 처음 리무진을 타고 인천 을왕리 해수욕장으로 가을 나들이에 나섰다. 이들은 마포구와 마포노인복지관이 함께 마련한 노인희망프로젝트 '꿈은 이루어진다'프로그램에 참여해 소박한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번 행사는 혈관성 치매를 앓는 이종만씨의 작은 꿈에서 시작됐다. 6월 어느 날 마포노인복지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은정(28ㆍ여) 사회복지사가 갑자기 이씨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이 나이에 무슨 꿈이냐"며 손사래를 치던 이씨는 잠시 생각해보다 "리무진 타고 복지관 다녀보는 게 꿈이야"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섞어서 답했다.
그렇게 흘러갔던 대화가 이 복지사의 마음에는 깊게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60만원의 대여료를 내고 리무진을 빌릴 수는 없었다. 이 복지사는 리무진 회사 수십 곳에 사정을 설명해봤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구청 홈페이지 게시판에 "'꿈은 이루어진다'프로그램을 통해 리무진을 타보고 싶은 어르신의 소원을 이뤄주는 건 어떨까요?"라는 글을 띄웠다.
구청은 흔쾌히 리무진 업체를 수소문 해줬고 예전부터 리무진으로 효도관광 봉사를 해오던 VIP리무진 이윤규(60) 사장이 나서 이씨의 소박한 꿈이 이뤄지게 됐다.
그러나 이 복지사는 이날 리무진에 오르는 이씨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간경화로 투병중인 아버지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6월 말 복지관을 떠났고, 7월 말 아버지를 위해 간의 일부를 떼어 이식하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이날 전화로 반가운 소식을 접한 이 복지사는 "노인이니까 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며 "꿈을 꾸며 행복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드리는 게 진짜 노인 돌봄"이라고 말했다.
낮 12시30분쯤 을왕리해수욕장에 도착한 일행은 점심을 먹고 바다로 향했다. 한참을 말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던 이종만씨는 "복잡한 서울에서 언제 저 세상으로 갈지 모르고 갇혀만 있다가 이렇게 나오니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것 같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열여덟 살에 친구들과 월미도 갔던 기억이 난다던 김정인씨는 즉석에서 멋진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하늘은 드높고 뭉게구름은 두둥실, 따우(땅위)에는 바다내음 뭉클하고, 잠자리 날고 있으매 바야흐로 가을이로세." 모두들 거동이 불편해 바닷물에 발을 담가보지도 못했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듯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날 노인들은 리무진을 직접 운전한 이 사장의 제안으로 인천국제공항 근처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멀리서 구경한 뒤 서울로 돌아왔다. 마포구 관계자는 "앞으로도 노인들 복지뿐 아니라 활기찬 노년을 위한 소원 들어주기 행사를 지속적으로 펼치겠다"고 말했다.
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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