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 농사가 어디나 그렇듯 이맘때가 가장 바쁘죠. 과일 따야 하고 선별해서 출하해야 하고…."
안마르코(58) 수사가 흙 묻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제초기에서 내려선다. 쓰고 있던 모자로 허름한 작업복 면바지와 셔츠를 툭툭 털더니 "배 따기 전에 우선 저것들을 다 깎아야 한다"며 사람좋게 웃는다.
잡초들이 1만여 평 1,200여 주의 배나무 밑동을 무릎 높이로 덮고 있다. 그는 10마력은 족히 될 듯한 제초기의 육중한 소음을 죽였다. '농촌지도소'에서 하루 5만 원씩 내고 빌려온 기계라고 했다.
그는 그 기계 일당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기도 끝나기 무섭게 배밭으로 나왔을 것이고, 파라솔처럼 낮게 펼쳐진 배나무 가지 아래를 누비는 동안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폈을 것이다.
수사 생활 31년, 배 농사 경력 20년의 그다. "요즘 젊은 수사들은 컴퓨터는 잘 하는데 몸 쓰는 일은 서투르다" "나도 선배 수사들한테서 이 일 배웠고, 요즘은 기술 가르쳐주는 데도 많다"….
기자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면서도 발걸음은 성당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땀 씻고 '스카풀라'(수도복) 갈아입고 가쁜 숨 고른 뒤 낮 기도에 늦지 않게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14일 오전 11시 30분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성 베네딕도 요셉수도원. 가을 풀벌레 소리는 제법 흥성흥성했지만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다.
수도원은 불암산 남향 자락 2만3,000평 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배밭이 펼쳐진다. 손바닥만한 성당 표지판은 과수원 길을 200여 미터쯤 올라가야 나타난다. 빨간 벽돌벽 단층 성당은 울창한 수림에 둘러싸여 은둔하듯 서 있었다.
"여기가 성당이고, 뒤편에 우리가 기거하는 집이 있어요. 배밭은 일터고요. 성당, 가정, 일터가 이 안에 모여 있죠. 자연스럽게 봉쇄적 수도생활을 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61) 원장수사가 가리키는 쪽배밭 사이사이로 피정 손님들을 위한 집이 몇 동 보였고, 텃밭엔 아름드리 김장배추들이 열 지어 여물고 있었다.
24시간 피정(避靜ㆍ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객을 위한 원장수사의 간략한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아시다시피 여기는 하느님의 집이고, 저를 포함해 8명의 수사들이 생활하고 있어요. 우리의 수도 가훈은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베네딕도회의 3대 서원(가난, 정결, 순종)과 별개로 우린 세 가지 서원을 따로 해요.
처음이 종주(終住)서원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산(山)처럼 머물며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다는 거죠. 둘째는 수도승다운 생활입니다. 규칙서가 정한 일과표대로 매일 기도하고 노동하고 성독(聖讀)하죠. 고인 물이 썩듯이 수행이 권태로워질 수도 있어요.
그 권태와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강(江)처럼 끊임없이 흘러야 합니다. 세 번째는 순종서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공동체의 수칙에 순종해야 하는 거죠.
베네딕도회의 규칙서는 1,500년 전 그대로 글자 한 자 바뀌지 않았습니다. 즉 수도회가 탄생하던 중세의 그 순수한 시간과 정신 안에 사는 겁니다. 하늘과 땅, 하느님과 사람, 관상(觀想)과 활동의 균형 영성이죠…. 궁금하신 점 있습니까?"
_ 외출은 안 하세요?
"여긴 반(半) 봉쇄수도원이에요. 병 나면 병원도 가고, 일이 있으면 허락 받아 나갈 수 있습니다. 1년에 2주씩 휴가도 있죠. 하지만 일 없이 외출하는 수사님은 안 계세요."
_ 수도사의 봉쇄적 수행이 세상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나요?
"교육ㆍ의료 등 세상 최전방에서 일하는 활동수도원도 있고, 철저히 폐쇄적 수행을 하는 봉쇄수도원도 있죠. 전자가 봉사를 실천하는 수행이라면, 우리는 기도로 봉사합니다. 다양한 자리에서 서로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겁니다. 봉쇄가 진공은 아닙니다. 꽃 향기가 벽을 넘어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듯, 정갈하고 높은 정신은 어떻게든 세상에 영향을 주죠."
_ 수사는 어떻게 되셨어요?
"서울교대 나와서 8년 정도 교편을 잡았어요. 34살에 입회한 뒤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했고, 가톨릭신학대를 졸업한 뒤 여기 들어왔어요."(그는 1989년 서품을 받은 성직수사이다)
'사연'을 물었으나 그는 '이력'으로 대답했고, 당혹스러워하는 기자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그 미소에 밀려 더 깊이 나아가지 못했다.
_ 이 안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나요?
"방에 가시면 수도원 일과표가 붙어있을 겁니다. 기도와 미사는 매일 7차례인데 피곤하면 쉬시고 괜찮으면 시간 늦지 않게 성당으로 오세요. 식사는 직접 해 드셔야 합니다. 여기는 수도하는 곳이니 조용히 지내주시기 바랍니다."
수도사는 해가 진 뒤, 그러니까 저녁기도(오후 5시 30분) 이후론 다음 날 아침 식사(오전7시) 때까지 '대침묵'(묵언 수행)해야 한다. 실내나 숲 속 등 하늘이 가려진 공간에서는 밤낮없이 '소침묵'해야 하는데, 할 말이 있더라도 속삭이듯 나지막이 하라는 것이다.
침묵이 깊은 만큼 대화가 깊어지고, 성령의 메아리도 더 멀리 퍼진다는 게 성인(聖人)의 말씀이라고 했다. 창세기가 가르치듯 '말씀'이 중한 만큼 오래 정화한 뒤 아껴 말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수도사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에 시작된다. 4시 50분부터 아침기도. 묵상과 아침미사에 이어 식사-기도-노동-낮 기도-식사-기도-노동-기도-성독-식사-끝 기도(오후 7시 15분)…. 이후로는 자유 시간이다. 수사들은 늙으나 젊으나, 평수사든 신부수사든 방 청소며 빨래 등등을 직접 해야 한다.
그믐달 뜬 수도원의 밤은 밤답게 짙고 적요했고, 고단했을 수사들의 거처는 이내 그 어둠 속으로 스몄지만, 마음이 고단한 피정객의 밤은 별빛처럼 어지러웠다.
베네딕도회는 이탈리아 태생의 성 베네딕도(480~547경)가 저술한 수도규칙을 따르는 남녀 수도원들의 연합체다. 연합의 구심력은 인간의 조직인 총연합이 아니라 성인의 가르침인 베네딕도 규칙서이고 궁극적으로는 성경이다.
그러므로 베네딕도회란, 같은 수도규칙을 따르는 수많은 자치수도원의 통칭이라 봐야 한다고 했다. 전 세계에는 총 300여 개의 자치수도원과 8,000여 명의 종신서원 수도자가 있다.
왜관 본원과 예속ㆍ부속수도원 등 6곳에 총 145명 수도자가 있는 한국 베네딕도회는 올해로 전래 100주년을 맞았다.
22일부터 전 세계 21개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수장인 총재 아빠스(수도원장)들이 왜관 본원에 모여 세계 총재 아빠스회의를 여는 등 다양하고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큰 집' 잔치의 들뜬 분위기를 요셉수도원에서 감지하기란 불가능했다.
축제의 하루도 어제와 다르지 않고, 100년 전, 1,000년 전의 하루와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그들의 규칙이고 약속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날 아침부터 안마르코 수사의 제초기는 어김없이 굉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그는 마침 간식 먹을 때라며 잘 익은 황금배 대여섯 개를 따서는 텃밭 너머 비닐하우스 '사무실'로 피정객을 안내했다.
작업복 차림의 수사들은 영락없는 농사꾼들이었는데, 언제 수사였나 싶게 왁자하게 웃기도 하고, 농담들도 격의없이 주고받는다. "올해 첫 배예요" "와, 맛이 들었네. 젯상에 올려도 되겠다" "어서 따야겠는걸" 요셉수도원의 최연장자인 이바오로(77) 수사가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보곤 반색하며 "증명사진 하나 찍어달라"고 청하자, 안마르코 수사가 대뜸 "영정사진은 천천히 챙기셔도 됩니다"라며 딴죽을 걸었고, 강피델리스(41)수사는 "우리 수도원에서 제일 젊은 오빠시면서…"라며 분위기를 거들었다.
푸근한 농담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음이 급해진 이바오로 수사는 "영정으로 쓰려면 수도복을 입어야 한다"며 숙소 쪽으로 불편한 걸음을 옮긴다.
"작년 이맘때 척추퇴행성협착증 수술을 받았는데 아직 걸을 때 균형을 잘 못 잡겠어." 수사생활 49년. 그만큼 하느님과의 친분도 두터울 그에게 생애 내내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물었더니 그는 공동체 생활이라고, 성욕을 이기는 것보다 낯선 형제와 마음 맞춰 지내기가 더 힘들더라고 단숨에 대답했다.
"다들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잖아. 기도는 늘 행복했는데, 낯선 형제들과 마음 맞춰 지내는 게 힘들었어. 서로 알고 나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인데…. 여기, 이 안에도 희로애락은 있거든."
노(老)수사의 가식 없는 토로가, 웃자란 배나무 가지를 철 따라 쳐내듯 거센 욕망들을 끊임없이 길들이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그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게 했다.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과의 수직적 대화지만, 참된 기도는 신에게 나아간 영혼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이웃을 향해 수평으로 퍼지게 된다고, 이웃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또 다른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고 그들의 기도서는 가르치고 있다.
수도원의 담장이 높은 것은 세상을 멀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멀리 더 낮은 세상까지 나아가기 위해 영혼을 돋우고자 하는 서원의 높이이고 염원의 상징이다.
이바오로 수사의 묵상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내 생의 어떤 기쁨이 존재조차 모르는 그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배꽃 필 때 쉬러 와. 그 때도 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수사는 환한 가을 햇살 속에 서서 햇살보다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전송했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사진=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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