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효의 동명 인기 소설을 1992년 스크린으로 옮긴 '하얀 전쟁'의 주인공 한기주(안성기)는 룸살롱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에게 'XX'이라며 입술을 들썩인다.
그 상스러운 대사의 사운드가 의도적으로 뭉개져 고막을 자극하지 않았지만 욕의 불모지대였던 당시의 충무로 현실을 감안하면 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2000년대 조폭 영화의 등장으로 금기의 둑이 무너지기 전까지 욕은 한국영화에 있어 금단의 그 무엇이었다. 아무리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도 등장인물은 "치도곤을 맞을 놈" "벼락 맞을 자식" "내 분노의 주먹을 받아라"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등등 문어체적 표현 이상의 대사를 쓸 수 없었다. 공중도덕과 사회윤리의 정립을 명목으로 검열을 정당화했던 군사독재정권이 만든 웃지 못할 풍경이다.
금지 대상은 욕설만이 아니었다. 특정 대학이나 특정 상품, 특정 기업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불순하게 취급됐다. 1990년대까지 영화 속 대학생들은 대부분 한국대학이나 한국여대 재학으로 묘사됐다.
MBC 드라마의 주인공은 언제나 문화대학을 다니곤 했다. 대중문화가 학벌을 조장하고,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민주화와 함께 표현의 자유가 정착하면서 팔도의 갖은 욕이 스크린을 채우는 동시에 사회적 의미를 띤 대학의 고유명사도 영화의 주요 대사로 등장하게 됐다.
'가문의 영광'에서 반강제로 조폭 집안의 사위가 되는 박대서(정준호)는 서울대 법대 졸업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묘사된다. '타짜'의 정 마담(김혜수)은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명대사로 꼿꼿한 자존심을 과시한다.
24일 개봉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한 대기업의 실명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식물인간인 형 간호에 지친 영화 속 등장인물이 내뱉는 말. "나 삼성전자 그만 둔 사람이야." 예전 같이 삼송전자나 사성전자 등으로 묘사했으면 등장인물의 절박함이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이름이 대중문화에서도 높은 사회적 계급과 신분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부상했다는 사실,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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