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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13> 박정희 정권과의 대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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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13> 박정희 정권과의 대회전

입력
2009.09.21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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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과의 대회전'이란 제목을 써 놓고 대회전(大會戰)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그런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쓰는 것은 1971년은 그야말로 민주세력과 박정희 정권이 삼국지의 '적벽대회전'과 같은 대회전을 치른 해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1969년에 '3선 개헌'을 단행했는데, 이것은 대통령을 한 번 더 하겠다는 것을 넘어 영구집권을 위한 포석이었다.

박 대통령은 1971년 4ㆍ27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정도 앞둔 4월20일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듣기에 따라서는 대통령을 한 번만 더 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선거 없이 영구집권을 하겠다는 뜻임이 분명했다. 이러니 민주세력으로서는 총력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민주세력이 박정희 정권 반대투쟁을 전개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자금을 들여와 그런대로 경제를 성장시킨 점이 있으나,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서민대중의 고통이 너무나 컸고,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1970년 김지하의 '오적'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5적(五賊)-5졸(五卒)-7도(七盜)'란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니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한국경제의 대일예속을 크게 우려했다. 그런데 1971년 3월 '정인숙 여인 사건'이 터졌는데,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부도덕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정 여인이 낳은 아이의 성이 정씨(정일권 국무총리)인지 박씨(박정희 대통령)인지 모른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된 데다, 정 여인을 죽인 사람이 그의 오빠라는 믿기 어려운 일이 겹쳐지면서 박 정권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여기다가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의 대중적 토대를 마련키 위해 예비군을 강화하고 학생군사훈련(교련)을 확대 실시했다. 중앙정보부의 무소불위한 횡포, 야당과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 등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기도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민주세력도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최선의 준비를 했다. 학생운동세력은 전국적인 연락망을 확보하고 있었고, 비록 수는 적었지만 재야의 지식인들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서 박정권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970년 10월, 김대중씨가 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평소 신문에 보도되는 국회속기록에서 상당한 정보를 얻곤 했는데, 이중재, 오세응, 김대중 의원의 발언이 가장 볼만했다. 특히 김대중 의원은 박 정권의 경제적 실정을 잘 파헤쳐 크게 공감되었다.

그런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니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학생들 가운데 선거에서 이기려면 호남 출신인 김대중씨보다 영남 출신인 김영삼씨가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어쨌든 김대중씨는 대통령 후보가 되자마자 전국을 누비면서 혜성처럼 떠올랐는데, 새로운 정치적 희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의 공약이 신선했다. '대중경제론'도 좋았지만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3권 보장, 4대국 보장론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내용들이었다.

1971년의 상황이 이러했으니, 박정희 정권과 민주세력의 대회전은 불가피했다. 그래서 나는 '박정희 정권과의 대회전'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술할 텐데, 이에 앞서 밝혀둘 일이 있다.

내가 기술하는 내용은 지극히 나 중심적인 것이고, 대단히 제한된 내용이라는 점이다. 전국적으로 반독재민주화투쟁이 벌어졌는데, 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은 물론 그 많은 일을 알 수조차 없었다.

더욱이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운동은 당사자 이외에는 알 수 없게 해야 했고, 만약 다른 사람이 알게 했다면 그것은 올바른 운동이 아니었다.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받더라도 자기가 한 일조차 부인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한 일은 알기 어려운데,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글을 쓰는 게 대단히 곤혹스럽다. 내가 하거나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을 쓰다 보면, 마치 내가 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비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설사 운동을 주도한 측면이 있더라도, 또 주도한 측면이 있을수록 자기가 한 일을 드러내지 않아야 정상인데, 주도한 것도 아니면서 주도한 것처럼 쓰게 된다면 이것은 역사에 죄를 짓고 개인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내가 했거나 내가 아는 바를 기술해보고자 한다.

1971년은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기도가 궤도에 오르느냐, 아니면 국민의 저항에 직면해 퇴각하느냐의 역사적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물론 4ㆍ27대통령선거가 가장 중요한 정치현안이었지만, 학생들로서는 교련반대투쟁을 우선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언론이 민주화되지 않고는 박 정권을 물리치기 어렵다는 점에서 언론민주화투쟁 또한 시급했다. 그래서 나는 '자유의 종'을 통해 교련의 부당성과 언론의 어용성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3월 개학과 동시에 낸 '자유의 종' 8호에서 '학생군사훈련이 갖는 문제점'이란 글을 통해 교련실시의 진정한 목적은 국가안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권안보와 영구집권 기도에 있음을 밝혀 각 대학에 배포했다. 그리고 '자유의 종'에 언론의 어용성을 규탄하거나 언론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많이 실었다.

그러나 글만 쓴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특히 1971년에는 수업을 전폐하고 광화문 근방에서 하루에 수 십 명씩 만났는데, 서울상대의 심재권은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앞으로 이들과 함께 어떤 일을 했는지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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