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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愛] 114안내원 최성옥·최윤정·김경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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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愛] 114안내원 최성옥·최윤정·김경애씨

입력
2009.09.21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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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수화기너머 그녀는 매번 속삭인다. 늘 망설임 없는 다정한 톤, 상대의 달팽이관이 떨릴 찰나(刹那) 대꾸는 갈린다. "징그러워요" "고마워요"는 그나마 양반. "진짜요?" "얼만큼 사랑해?" "처자가 있는 저를 사랑하면 안돼요!"는 헛웃음이 나온다. "저도 사랑해요"(느끼하게)는 닭살 돋는다.

그녀가 꼽는 최고의 응대고백은 "존경합니다"다. '아, 나도 존경 받는 존재구나' 하는 설렘이 그녀의 영혼을 띄운다. 2년 넘게 쉴새 없이 사랑을 속삭였던 그녀들은 올 초부터 "반갑습니다"로 그대를 맞는다. 각종 유머코너에서 '풀리지 않는 로맨스'라 불린, 당사자들조차 "쉽게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던 그녀들의 '사랑고백'(?)은 이제 어렴풋한 추억이 된 셈.

#청각만큼은 뒤지지 않는 그녀들도 도통 못 알아듣겠단다. 상대는 벌써 몇 번째 "스닝용품"(사투리억양)만 찾는다. "성인용품 말씀이십니까?" 아니란다. 송신자도 수신자도 답답할 노릇. 알고 봤더니 상대가 원한 건 '스님용품'이었다.

고객이 "만나고 싶어" 한다. "장난전화는 받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상대의 음성은 푹 잠겨 뒷소리가 애매(언뜻 '만나고시버어'로 들리는)하다. 또박또박 말해달랬더니 '맛나 고시원'이었다. 심지어 이런 고객도 있다. "급한데 119가 몇 번이죠?"

'국민 대표비서'를 자처하는 그녀(금남의 직종이라 굳이 구별)들의 재담엔 날것의 우리네 삶이 녹아있다. 수많은 에피소드와 각종 사연이 꼬리를 문다. 한국인포서비스(KOIS)의 114안내원 최성옥(34) 최윤정(33ㆍ이상 서울본부) 김경애(30ㆍ강원본부)씨와의 만남은 그래서 즐거웠다. "하루 종일 말만 하는 직업이라 일 끝나면 침묵한다"는 그들이기에 더욱.

하루 평균 1,080건의 인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그들은 옷깃 한번 스치지 않는 인연을 매일 1,080건(콜)씩 쌓는다. 모두 9년 이상 경력을 쌓았으니 그간 맺은 인연의 횟수는 백만 단위를 훌쩍 넘긴다. 건당 평균 15~18초, 극히 짧은 만남이지만 인연맞이는 정갈하고 꼼꼼하다.

"비타민C와 한방 차는 꼭 챙겨먹고,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자는" 건 기본. 목소리만 들려주면 그만일 텐데 "마음가짐을 위해" 제복도 단정히 갖춰 입는다.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120㎝짜리 정사각형 책상엔 모니터 외에도 거울이 놓여있다. 행여나 웃음을 잃을까 싶어서다. 고른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한 습도 조절용 분수가 사무실 중앙에 자리잡은 것도 이채롭다. 월요일 오전이 가장 바쁘단다.

대화상대를 볼 수 없다는 건 미묘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 펜팔이 그렇고 메신저가 그렇다. 전화번호 알려고 누른 114 너머 목소리가 곱다면 불현듯 만나고 싶어진다. "'얼굴도 예쁘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진짜 회사까지 찾아온 남성도 있다"(윤정)고 한다. 대개는 술 한잔 걸친 경우가 많지만 설사 찾아온들 경비실에서 막으니 만날 수는 없다. 역으로 고객의 목소리가 좋으면 가끔은 안내원들도 "만나봤으면" 한단다.

대면이 아닌 터라 오해와 편견도 많다. 그저 자판 두드려 모니터에 뜬 번호나 알려주는 일로 여기는 게 대표적. "그러니 114나 하고 있지" 하는 초등학생이나 욕지거리와 하대를 일삼는 고객과 통화하면 맥이 탁 풀린다.

생각만큼 단순한 직업은 아니다. 상식과 이슈를 꿰고 있어야 한다. 매일 정보교육도 받는다. 프로야구 점수, 날씨(예컨대 "강원도 비 와요?"), 광고 카피(예컨대 "띠링띠링 하는 보험사 번호가 뭐죠?"), 건물위치 등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묵동 vs 목동' '코레일 vs 코렐' 등 비슷한 발음의 지역과 상호가 많아 서울 전지도 쯤은 달달 외우고 있어야 한다"(성옥)고 할 정도. 괴팍한 상호(이눔스키 등)는 왜 그리 많은지. 더구나 10초 남짓에 원하는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분석하려면 핵심을 빨리 파악해야 한다. 고객들은 빈틈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없이 걸려오는 장난전화와 애매한 요구는 또 어떤가. 응대 매뉴얼이 무려 19가지나 되지만 감당이 안 될 때가 많다. "3분 넘게 욕을 하더니 '아 기분 후련하다'고 끊어버리는 여성"(윤정), "신음소리만 내는 변태남성"(경애), "종로3가 파출소를 '종삼파'라고 제 멋대로 줄여놓고 무식하다 타박하는 중년"(성옥)도 있다.

악연은 가연(佳緣)이 있기에 참을만하다. "10콜 이상을 포기하고 장애인에게 4분 넘게 상세히 설명했더니 그분이 '행복하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다른 분들도 행복하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걸 녹취해서 다른 직원들에게 들려줬더니 얼마나 감동스러워하던지."(경애) 안내원들의 친절에 감동해 화분 오징어 떡 등을 경비실에 살짝 맡기고 가는 고객도 있단다.

세상이 보이는 전화 한 통

안내원들은 목소리를 통해 세상을 읽고 배운다. 그리고 본다. "한전 찾는 전화가 유독 많으면 어김없이 정전이 난 거고"(윤정), "전화가 현저히 줄면 월드컵 같은 대형행사가 있고"(경애), "유독 이상한 전화(정신질환자가 주로 하는데 '날씨걸이'라고 부른다)가 많이 오면 흐리거나 비가 쏟아질 징조"(성옥)란다.

세상 인심도 박하고 월급도 짜지만 수화기너머 전해오는 희로애락에 반해 어느새 전화안내가 삶의 전부가 됐단다. "목소리만 듣고도 상대의 인품과 성격을 볼 수 있고, 다양한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윤정)는 것이다.

목을 아끼느라 절대 노래방은 못 가고, 귀가하면 전화도 받지 않고, 잠꼬대도 두 손 모으고 "네 고객님~" 할 정도고, 늘 자신을 낮춰야 하는 직업. 그래도 자부심과 행복은 넘친다. 여성만 있다 보니 육아휴직 보육시설 등 복지가 잘 돼있고, 무엇보다 외모지상주의에 찌들지 않았다. "장애 등 외모가 아닌 목소리와 성품만 보기 때문"(성옥)이란다.

자동응답시스템(ARS)이 범람하는 요즘 114안내는 딱딱한 기계음이 아닌 정겨운 사람 냄새가 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다. "꼬마가 '곰 3마리'를 어떻게 부르냐고 해서 불러줬더니 고맙다고 하더라"(윤정)는 일화는 어쩌면 114만 가능하다.

늘 요구만 들어주던 그들이 고객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욕해도 좋아요, 기분을 풀어드릴 수 있다면. 뭐든 어렵고 당황할 때는 잊지 말고 찾아주세요. 더 친절해질게요. 반갑습니다, 고객님~"

▦114안내원의 첫인사 변천사

-1935~1980년대: "몇 호입니다"

-1980년대: "안내입니다"

-1990년대" "네네∼"

-1997~2006년: "안녕하십니까"

-2006~2009년 초: "사랑합니다"

-2009년 초~: "반갑습니다"

고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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