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유명 교수의 책을 보고 매우 실망한 적이 있다. 당시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그 교수는 대중용 역사서를 썼는데, 거의 같은 내용과 형식으로 이미 수많은 책이 나와 있던 터였다.
그런 소재를 다룬 것도 그렇거니와 내용이나 주제에서도 기존 서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책이 꼭 거창하고 늘 새로운 내용과 주제를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명성의 학자라면 쓰지 말아야 할 책이었다.
문득 그때가 생각나는 것은 최근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한 문인이 낸 책인데 그가 쌓은 명성과 비교하면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대한 평가가 때에 따라서는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생각이 나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일부 유명 작가, 교수가 책을 너무 쉽게, 너무 편하게 내는 경향은 지적하고 싶다. 거기에는 출판사와 얽힌 관계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출판에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책은 누구든 부담없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글을 써서, 책을 내서 명성을 쌓은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돋보이는 책이 이번 주에 나온 <계단, 문명을 오르다> 이다. 계단이라는 대상을 다뤘다는 점에서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세상에 나온 적이 없는 책을 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비슷한 소재, 비슷한 주제의 책이 이미 쏟아져 나와 있는데 거기에 저자의 유명세를 더해 슬쩍 책 한 권 얹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계단,>
혼신의 힘을 다하는 진정한 도공은, 티끌만한 흠이라도 발견되면 소중하게 만든 도자기를 가차없이 깨뜨린다고 한다. 그 역시 공들여 만든 도자기가 아까울 터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명성과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을 것이다. 독자의 사랑을 많이 받은 필자일수록 책임은 더 커진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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