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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밤섬 주민 130명 추석 앞두고 귀향제…"철새 보금자리로 부활한 모습에 흐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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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밤섬 주민 130명 추석 앞두고 귀향제…"철새 보금자리로 부활한 모습에 흐뭇"

입력
2009.09.21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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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강시민공원 망원지구 선착장. 하늘은 단 한 번의 푸른 붓질로 채운 듯 티없이 맑았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어르신들은 대여섯 걸음 전부터 손을 마주 내저으며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추석을 앞두고 이른 귀향길에 오른 한강 밤섬의 옛 주민들이다.

실향민 130여명을 태운 널따란 바지선은 살랑이는 가을 바람을 타고 서서히 강물 위를 미끄러져갔다. 밤섬이 가까워질수록 귀향의 설렘에 들뜬 실향민들의 뺨은 더욱 불거졌다. 이들이 추석을 앞두고 밤섬을 찾아 '귀향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 이듬해부터 격년제로 행사를 치렀는데, 2007년엔 한강물이 불어 귀향을 포기해야 했다.

4년 만에 옛 주민들을 맞은 밤섬은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밤섬에 내려 강 건너를 한참 바라보던 한윤호(71)씨가 무겁게 입을 뗐다.

"여름이면 여기서 저기 서강동까지 200여m를 헤엄쳐 건너고, 겨울이면 썰매 만들어 얼음 지치며 타고 놀았지. 예닐곱 친구들이 늘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지금은 나만 남았어…." 옆에 있던 서순식(62)씨도 거들었다.

"금빛은빛 모래사장이 얼마나 좋았는데. 해가 비추면 반짝반짝 했지. 그때는 한강물도 깨끗해서 그냥 길어다가 항아리에 담아두고 먹어도 전염병 한 번 걸린 적 없었어."

멀리서 보면 밤톨 같이 생겼다 해서 그리 이름 붙여진 밤섬에는 수백 년 전부터 배 짓는 목수들이 정착해 살았다. 고기 잡고 땅콩농사 지으며 살던 이들이 고향은 등진 것은 40여년 전. 정부가 여의도 개발에 나서면서 제방 쌓기에 필요한 잡석과 흙을 밤섬에서 채취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1968년 2월 62가구 주민 443명은 창천동 등지로 이주했고, 5만8,000㎡에 달하던 밤섬은 폭파 해체됐다. 당시 섬 중심부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현재는 두 개의 작은 섬으로 남아있는데, 흰뺨검둥오리 등 철새 41종 5,000여 마리가 찾는 한강의 대표적 철새도래지로 자리잡았다.

밤섬 실향민들은 서울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주 만나 소식을 나누고 밤섬보존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옛 풍습을 이어왔다. 특히 음력 1월2일에는 처음 이주한 곳인 창천동 와우산 기슭에 모여 마을수호신에게 올리는 제를 지내고 있고, 추석 귀향제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이날 귀향 행사를 진행한 유덕유(74) 밤섬보존회장도 어린 시절 추억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맘때면 배 짓는 목수의 망치질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고 땅콩 밭에서는 땅콩 수확이 한창이었지요. 자루에 담긴 땅콩 한 주먹을 몰래 훔쳐 먹던 기억이 납니다."

실향민 가정의 복을 비는 귀향제에 이어, 용왕께 풍어를 바라고 강의 재앙을 막아달라고 비는 한바탕 굿판이 벌어졌다. "만백성 모아놓고 팔월 한가위를 맞아 집안일, 사업 잘 되게 해주시고, 모든 일 대박 나게 해주시고, 특히 신종플루 전염병 비켜가게 해주세요." 인간문화재 김충광씨의 재치 넘치는 비나리에, 두 손을 모아 빌던 실향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날 행사에는 밤섬 탐구에 나선 마포구 동도중 영상반 학생 10여명도 참석했다. 이들은 밤섬의 자연과 밤섬을 찾은 실향민들의 감상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기록했다. 나다은(15)양은 "솔직히 한강에 섬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며 "밤섬이 사라질 뻔한 아픔을 딛고 철새들의 고향으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고 말했다.

간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나눈 실향민들은 오후 2시께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장남으로 아버지 따라 목수 일을 배워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는 이일용(74)씨는 밤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봄, 가을이면 배 주문이 밀려들었지. 12자 정도 되는 낚싯배는 사흘이면 만들고 20자 정도되는 배는 일주일 정도가 걸리지. 정신없이 일만 해도 밥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

3시간 남짓한 짧은 방문을 마무리한 실향민들은 "2년에 한 번 찾는 고향길이나마 한강물 불어 못 가는 일 없게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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